▲ 1989년 8월 평양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땅을 밟은 임수경양(오른쪽에서 두 번째)을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문규현 신부(오른쪽에서 세 번째)를 파견했다. 사진은 북에서 열린 환송회 모습.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 ||
이때 사제단에서는 미국에 유학중인 문규현 신부에게, 북에 들어가 임수경 ‘수산나’와 동행하여 귀환하도록 요청을 한다.
당시 문 신부는 여러 사정으로 방북이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평양행을 결심한다. “수산나에게 보내는 짐을 지고 평양에 다녀와 달라”는 사제단의 요청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7월26일 사제단은 상임위원 일동의 이름으로 문 신부의 북한파견을 공식 발표한다.
“…우리 사제단은 문 신부를 7월25일자로 북한에 파견하였고 …임양의 원하는 바에 따라 귀환하리라 믿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제로서 신앙적 양심에 입각한 결단이며, 목자로서 양떼의 고난을 함께 겪으신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른 것입니다….”
사제단에 대한 비난이 일부 언론과 친정부단체에서 쏟아져나왔다. ‘좌경용공’이라는 색깔론은 그들의 ‘18번’이라 치고, 이번에는 한국천주교주교단에서조차 ‘유감’을 표명하는 담화문이 나왔다.
임양이 의도한 7월27일 판문점 귀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날 문 신부와 함께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 도착한 임양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북측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북한 당국은 자칫 정전협정 위반으로 문제가 커지거나 남북의 긴장이 고조될 것을 원치 않아서인지 한사코 판문점 통과를 저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제3국을 거쳐서 귀환하라는 북측의 권고를 뿌리친 채 통일각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단식 6일 만에 북한당국은 임양을 평양 외국인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했으며, 두 사람은 장충성당 미사 참석, 기자회견, 군중집회 참석 등으로 2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8월15일 오후 1시30분 판문점에 도착, 오후 2시20분 문 신부는 임수경양과 함께 기어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남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국가보안법의 칼날이었다. 당장 서울시경찰국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장시간에 걸친 조사를 받고나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 지난 2003년 5월26일 이라크전 반대와 새만금 보전을 위해 3보1배를 하는 문규현 신부(오른쪽)와 형 문정현 신부. | ||
재판부는 공판을 시작하기에 앞서 법정 내의 질서유지를 당부했다. 그러나 방청객들은 피고인 두 사람이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박수를 치고 장미꽃 송이를 던지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불렀다. “통일의 꽃 임수경을 석방하라”라는 구호도 외쳤다.
재판장은 개정 5분 만에 휴정을 선언했다. 다시 속개된 공판에서 10명의 방청객이 퇴정명령을 받았다. 법정 안밖에는 3천여 명의 전경과 3백여 명의 학생·시민이 대치하는 긴박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변호인들은 경찰의 과잉경비에 항의하고 병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임양과 문 신부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재판을 받고 싶다”고 재판연기를 요청했다. 법정 안에도 자유총연맹 등 우익단체 회원 50여 명이 이른 아침부터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방청객들의 구호나 박수에 맞서 고함을 지르고 야유하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소란 속에서도 피고인들의 모두진술이 있었다. 임양은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는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청년·학생들의 독자적 결단이었으며, 정부도 7·7선언이나 대통령연두기자회견에서 남북학생교류와 평축 참가 문제를 언급해놓고서, 나의 평축 참가가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기소한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검찰과 맞섰다.
한편 문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북한에 갔다. 실정법상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면 달게 받겠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상의 판결을 내리기 전에 통일의 정신으로 이 사건을 보아야 한다….”
다음해 2월5일, 1심 판결이 떨어졌다. 임수경 징역 10년, 문규현 징역 8년이었다. 항소심에서는 두 사람 다 징역 5년이었다. 문 신부의 친형인 또 한 사람의 문(정현) 신부가 선고 직후 외쳤다. “징역 5년만 살면 되니까 우리 모두 북한에 다녀옵시다.”
임수경양은 법정에서 내 변호를 받은 후, 서강대(언론대학원)에서 내 강의(저작권법)를 들었는가 하면, 결혼 때에도 내가 주례를 섰다.
나의 주례사 한 토막은 이러했다.
“이 혼인은 어느 한 쪽이 먹거나 먹히는 흡수통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무쪼록 두 사람이 서로 찬양·고무·동조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