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6월5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후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바뀜)가 발족, 전두환 상임위원장(왼쪽)과 박충훈 총리서리가 악수하고 있다. <’81보도사진연감> | ||
헌법과 공무원법상의 신분보장 따위는 이미 간 곳도 없고, 또 호소할 곳도 없었다. 하루아침에 공직에서 추방된 그들은 백수가 되어 힘든 생활을 하면서 복귀의 그날을 고대했다. 그러나 전두환정권의 5공화국이 서산에 기울 때까지 복직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6·29선언이 나오고 잠시나마 군부지배의 서슬이 무디어지는 듯하자, 국회해직자들은 복직을 실현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 중 선봉격인 임정호 이사관이 나의 고교선배라는 인연도 있고 해서 내가 앞장서서 소송을 떠맡았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8년 3월, 서울고등법원에 면직처분무효확인청구소송을 냈다. 그런데 재판은 이상하게도 미루고 건너뛰어 가며 지지부진했다. 1년이 훌렁 지나고 나니 더 참을 수 없어서 담당 재판부에 위헌제청신청을 제기했다. 면직처분의 근거가 된 국보위법(부칙 제4조)이 입법권이 없는 국보위에서 만들어졌으니 무효라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안일하게도 각하 결정을 했다.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1989년 2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 무렵 사건 당사자인 해직공무원 여러분이 소송에 기대를 걸고 자주 내 사무실에 드나들었다. 나는 위헌 판단을 받아내는 데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면직처분의 근거라는 국보위법은 입법권이 없는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헌법 제1조와 제40조에 위반된다. 뿐더러 그 법 부칙 제4항은 그 내용이 구 헌법 제6조 제2항과 헌법 제7조 제2항에 위반된다. 그런데 묘한 것은 국보위법에 “이 법은 헌법에 따라 새로 구성되는 국회의 최초의 집회일 전일까지 그 효력을 가진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 헌법소원 제기 시점에서는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는 것이었다. 국가(법무부)는 바로 이 점을 들어 실효된 법률은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한 가지 난점은 면직공무원인 헌법소원 청구인 중 장아무개 등 6명을 제외한 나머지 청구인들은 이미(1989년 6월) 원래의 직급으로 복직(재임용)되어 근무중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이른바 ‘소(訴)의 이익’이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런 논쟁에서 헌재는 청구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국보위법 전부의 위헌론은 비켜가면서도, 어쨌든 면직의 근거조항인 부칙 4항은 위헌이라고 했으니, 그만 해도 통쾌한 승리였던 것이다.
▲ 80년 8월23일 전역하는 전두환. 당시 정권을 장악한 그는 국보위법을 만들어 국회 직원들을 집단 해임시켰다. <’81보도사진연감> | ||
“…폐지된 법률에 의하여 권리침해가 있고, 그것이 비록 과거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로 인하여 발생한 국민의 법익 침해와 그로 인한 법률상태도 재판시까지 계속되고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며, 그 경우에는 헌법소원의 권리보호이익은 존속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미 복직한 사람들에게 소송의 이익이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도 긍정론을 취했다. 즉 재임용한 사람들도 9년 전 직급으로 신규채용되어 승진에 불이익을 받았고, 면직처분의 무효를 전제로 한 복직이 아니기 때문에 명예회복이 되지 않았다. 또한 면직기간 중의 보수·급여 등 경제적 손실도 회복할 수 없어 청구인들에 대한 권리침해의 현재성은 의연 존속하며, 따라서 소의 이익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또한 국보위법 부칙 제4항 후단에 “…그 소속 공무원은 이 법에 의한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그 직을 가진다”고 한 것은 공무원을 귀책사유의 유무를 불문하고 면직시킬 수 있기 때문에 헌법상의 공무원 신분보장 규정에 어긋나므로 위헌이라고 했다.
1989년 12월18일에 나온 헌재의 이 판단은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울고법에서는 금방 시원한 판결이 나오지는 않았다. 담당 재판부가 바뀌는 등 사정이 겹쳐 시일을 끌다가 헌재 결정 후 10개월 만인 1990년 10월24일에야 ‘면직처분 무효확인’ 승소판결을 받았다.
국가측이 모질게도 상고를 함으로써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8개월이나 지난 뒤인 1991년 6월, 피고(국가)의 상고를 기각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옴으로써 10년이 넘게 별러온 복직의 길이 열렸다. 소송을 처음 제기한 때로부터 3년 3개월 만의 때늦은 승리였다.
그러나 정작 국회측은 이들 해직자들에 대해서 여전히 냉대를 했다. 인사, 급여, 보직에서 지능적으로 규정을 악용함으로써 계속 불이익을 주었을 뿐더러 심지어는 서기관 2명과 이사관 1명에 대해서는 5년간이나 무보직상태로 두면서 봉급만 주었다. 국가가 아무 잘못 없는 공무원들에 대하여 이처럼 참으로 잔인무도했으니, 그 정권이 어찌 ‘저주’를 면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