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되기 두 달 전인 1994년 4월 양심수 후원회에 참석한 안재구 교수. 그는 공판에서 ‘구국전위’는 북한의 조선로동당과는 무관한 자주·민주·통일 운동조직이라고 밝혔다. | ||
안씨는 북한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은 사실을 부인하고 구국전위는 결코 반국가활동이 목적이 아니고, 자신은 통일운동을 하려고 구국전위를 만들려다가 구속되었으므로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것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했다. 또한 금품수수 혐의부분은 1993년 3월 정화려씨(당시 29세·현 유월농장 대표)를 통해서 재일동포로부터 일본돈과 서신을 받은 사실은 있으나, 조금도 불온하거나 반국가적인 내용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정화려―그가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사건의 또다른 주인공이다. 그는 1986년 10월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반외세·반독재 전국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결성대회에 참가하였다가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일이 있다. 이어서 1987년 12월11일, 제12대 대통령선거 직전엔 KBS별관 점거농성 사건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정씨에 대한 이번 혐의는 그가 “안재구의 지시에 따라 세차례 일본에 가서 북한의 지령을 받아 활동중인 백명민과 만나는 기회에 문건과 자금을 제공받아 안재구에게 전달하는 등 구국전위의 조직원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씨가 일본에 가서 백명민을 만나고 돌아온 뒤 서로 문통을 하고 그로부터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를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라고 볼 증거는 없으며, 구국전위는 미처 단체로서의 기본골격조차 갖추지 않은 상태에 있었고, 안씨가 창립선언문, 강령, 규약 등을 기초·검토했다는 점만을 가지고(아직 단체다운 조직과 인적구성 등이 갖추어지지도 못한 상태에서) ‘단체의 구성’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위의 문건들에도 반국가적인 내용은 없었다.
▲ 1996년 8월 민가협 주최로 명동성당에서 열린 구속자 석방 촉구 캠페인에 정화려씨의 딸과 부인이 함께 참여했다. | ||
그는 안씨를 도와주었다고 간첩방조행위로 기소되었으나 여기서 ①북한이 우리의 ‘적국’인가 ②안씨가 적국을 위한 간첩인가. ③피고인이 안씨가 간첩인 줄 알고, 나아가서 자신이 전달하는 서신 내용이 간첩죄로 처단될 만한 이적성을 갖고 있는가―등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런 간첩방조죄를 인정할 논리나 증거는 없었다. 정씨가 재일동포한테서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보안법에서 말하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금품수수’는 아니었다. 특히 혐의사실에 대한 증거라고는 고문 등에 의해서 강요된 (허위)자백밖에 없으며, 아무런 보강증거도 없었다. 수사관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39통의 수사보고서를 유죄의 증거로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검찰은 안씨가 구국전위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였고, 북의 지령과 거액의 공작금을 받고 활동했다는 논고에 이어 안씨에게 사형을, 정화려씨에게는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안씨는 다음과 같은 최후진술을 남겼다. “40대에 대학연구실에서 추방되어 10년간 감옥생활을 하였고, 이제 얼마를 더 어두운 감옥에서 살아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뒷날, 어떤 수학자가 있어 학문과 민족통일의 길에 그의 온 힘을 다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11월30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안씨에게는 무기징역이, 정씨에게는 징역 10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그들은 항소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었고, 대법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씨는 <월간조선> 94년 9월호에 자기가 일본에서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고 보도한 것은 허위사실 유포에 인한 명예훼손이라고 소송을 제기하여, 일부 승소 판결(위자료 5백만원 지급)을 받기도 하였다.
안씨는 1998년 8월에야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뒤 다음해 광복절에 석방되었다. 정화려씨는 98년 광복절에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