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으로 평화군축을 위한 대회에서 대회사를 하는 조화순 목사. 그는 도시산업선교의 선구자이면서 민주화투쟁의 선봉장이었다. | ||
1987년은 6월민주항쟁과 그에 뒤이은 6·29선언, 그리고 양 김(김대중·김영삼) 중심의 야권 분열,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 등으로 곡절이 많았던 격동의 해였다. 특히 전국적인 6·10시위로 시작된 민주항쟁을 통해서 전두환 폭정에 대한 항거가 거세지는 가운데 노사간의 분규 또한 격화일로를 치달았다.
그해 9월15일 오후 6시, 서울 종로5가에 있는 기독교회관 안의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 30여 명의 교계 인사들이 모였다. 조화순, 이근복, 이춘섭 세 목사의 얼굴도 보였다. 그들은 ‘당국의 노동운동 탄압 중단’과 ‘구속 근로자 즉각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를 성토했다. 그리고 9월5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전경련 조규하 전무가 노사분규에 관해서 허위날조된 보고를 한 데 대하여 전경련측이 사과문을 발표할 것과 조규하 전무를 파면할 것을 요구하면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경련측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은 채 시간만 흘렀다. 18일 낮이 되자 그들은 전경련 회장을 만나 직접 요구사항을 말하기로 작정하고 목사·전도사 등 23명이 전경련회관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검찰은 그들이 전경련 회장실을 점거한 것이라고 했다. 나가달라고 요구하는 비서과장이라는 사람에게 이근복 목사는 “우리는 4일간이나 단식한 목사들이다. 전경련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 국무회의에서 노사문제를 날조 보고한 데 대하여 사과를 받을 때까지 여기서 단식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조화순 목사는 그 자리에서 핍박받은 근로자들을 위하여 다 함께 싸우자는 설교를 하고 기도를 했다. 찬송가도 불렀다. 이춘섭 목사는 ‘우리는 왜 전경련회관에 들어왔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낭독하고 ‘우리의 요구사항’을 외쳤다.
검찰은 앞서 말한 다섯 사람을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및 업무방해죄로 구속기소하였다. 그런데 검찰에서는 피고인들이 노사분규를 배후 선동해왔다면서 노동쟁의조정법위반사실을 조사한다는 이유로 공판의 연기를 신청했다. 이에 항의하여 조 목사는 옥중 단식을 했다.
조 목사는 1978년 11월 부산에 가서 강연을 하고 나온 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때 나는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어 변호인석에는 나가지 못하고 방청석에서 그의 앙칼진 법정진술을 들었다.
조 목사는 여성 성직자로서 이 나라 도시산업선교의 선구자였다. 뿐인가, 민주화투쟁의 선봉장이었다. 그분은 나이 어린 여공들과 노동현장에서 고락을 함께하면서, 시멘트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그들과 함께 기거했다. 어린 여공들이 내미는 소주잔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 마시며 울분을 삭이거나 격려를 하는 그런 어머니 같은 목사였다. 그분의 설교는 웅변 이상의 열정으로 뜨거웠고 법정진술은 막힘이 없이 용감했다. 70·80년대에 나온 기독교계나 재야의 여러 성명서엔 그의 이름이 언제나 버티고 있었다.
▲ 1974년 11월22일 인천기독교산업선교회가 연 신앙강좌. 반정부 시국강연회였던 이 집회는 늘 성황을 이뤘다. | ||
그는 1974년 5월, 1978년 12월, 1980년 5월, 그리고 1987년 9월 ― 이렇게 네 번에 걸쳐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고, 연행이나 구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겪었다.
어떤 분은 조 목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역사의 뒷바라지를 할 양으로 바닥에 내려갔으나 역사는 그를 앞잡이로 만들어버렸다.”
조 목사는 1934년 갑술생이다. 동갑내기 개띠끼리 ‘개판’이라는 모임을 만들었으니, 조화순, 박현채(작고·경제학자), 이해동(목사), 김중배(언론인) 그리고 한승헌(변호사)이 그 멤버였다.
‘한승헌 변호사의 변론사건 실록’이 이번 호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간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10여년 전, 우리는 회갑모임을 합동으로 하자는 데 합의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말했다. “행사장 입구에다 반드시 ‘맹견주의’라고 써 붙입시다.” 인천쪽 산업선교활동의 인연으로 여성근로자들이 나서서 조 목사의 회갑축하행사를 따로 치르는 바람에 합의는 깨졌고, ‘맹견’들은 어언 70의 고개를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