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서울올림픽 30주년특집(4·끝)-‘상계동 올림픽’ 김동원 감독 인터뷰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막한 지 30주년을 맞았다. 그 벅차오르던 나날을 추억하는 동안 소외되는 역사도 있다. 바로 강제철거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은 도시 미화와 성화가 지나가는 자리라는 이유로 달동네를 강제철거하기 시작했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철거민들은 전국이 ‘세계인의 축제’로 들썩일 때 하늘을 지붕 삼으며 악을 써야 했다. 상계동 173번지 판자촌도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1세대’ 김동원 감독의 첫 독립다큐 ‘상계동 올림픽’(1988)에는 참담했던 그때의 상계동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김 감독은 1986년부터 3년간 상계동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투쟁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 작품은 한국 다큐멘터리 최초로 ‘야마가타 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환희’ 뒤에 존재하는 ‘아픔’도 기억해야 하는 법이다. 서울올림픽 개막 30주년을 앞둔 9월 13일, 서울 대림동 ‘푸른 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김동원 감독은 상계동 주민들과 3년을 함께 살며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을 제작했다. 사진=고성준 기자
1986년 10월 김동원 감독은 ‘도시빈민 운동’을 펼치고 있던 정일우 신부의 급한 부탁을 받는다. 용역 깡패들이 마구잡이로 집을 철거하고 있는데 나중에 재판을 걸 때 증거로 제출할 영상을 찍어달라는 것이었다. 다큐가 뭔지도 제대로 몰랐던 김 감독은 일단 상계동으로 향했다. 그는 “상계역에 내리자마자 포크레인 굉음이 들렸다”고 회상한다. 상계시장을 지나자 그야말로 공터나 다름없는 마을이 펼쳐졌다.
“173번지는 원래 서울 도심에서 쫓겨난 철거민이 모인 마을이에요. 집이 군대 막사 같은 형태였는데 한 집이 포크레인에 찍히면 옆집도 너무 쉽게 무너졌어요.”
그렇게 무턱대고 찾아간 상계동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그는 3년을 주민들과 함께 살았다. 싸워야 하는 그들에게 올림픽을 관전할 여유같은 건 없었다.
“그냥 거기 더 있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모르기도 했고 주민들도, 신부님도 좋았으니까. 나중엔 의리 같은 것이 생기기도 했고. 저는 상업영화에는 영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상계동으로 인해 지금의 일을 하게 됐고 삶의 가치관, 종교관, 영화관 등이 모두 바뀌었어요”
재개발은 어제까지 반찬을 나눠 먹던 집주인과 세입자를 적으로 만들었다. 가옥주와 건설회사가 함께 재개발을 추진한다는 ‘합동재개발’ 아래 정부는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뿌연 먼지가 자욱한 철거 현장에서 아이를 등에 업은 여자와 노인들은 집주인들이 고용한 철거 깡패들을 향해 악을 쓰며 소리쳤다. 고려대 학생들이 주민들과 함께 싸우기도 했다.
“가옥주들의 모임인 재개발 조합에서 세입자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개별적으로 접근해서 ‘몇 가구 데리고 나가면 얼마를 주겠다’는 식으로 회유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싸우는 중간에도 여러 철거민이 나갔습니다”
정일우 신부와 주민들은 전쟁통 같은 그곳에서 하루에 두 번씩 미사를 드리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상계동 미사엔 성가 대신 개사한 민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상계동 미사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1987년 4월, 상계동 187번지는 완전히 철거됐고 삶의 터전을 잃은 정일우 신부와 상계동 주민 80가구는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앞에 두 개의 대형텐트를 짓고 남녀가 따로 나누어 300일간을 살았다. 주민들은 ‘살다 보니 한 평에 1억 원짜리 땅에서 살아본다’는 농담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올림픽 성화가 지나가는 자리라는 이유로 상계동 173번지는 철거되었다. 사진은 1987년 4월 상계동 판자촌 철거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이런 생활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상계동 주민 중 40가구는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성당을 떠나 남양주로 향한 것이다.
“6월 항쟁 때는 시위대와 밥도 나눠 먹고 괜찮았죠. 오히려 6월 항쟁이 끝나고 힘들었어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고. 명당성당을 보러 온 외부인이 천막을 들추기도 하고 특히 일요일이 되면 많은 사람이 그러니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겠죠.”
비극은 끊이지 않았다. 1987년 5월 4일, 철거 중이던 담벼락이 무너져 상계국민학교 2학년 어린이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큰 사건이었죠. 포크레인으로 집을 내려찍어 벽이 흔들거리는데 감시도 안 하니까 아이들이 그 주변에서 놀다가 그렇게 됐어요. 장례식장에 시신이 옮겨졌고 우리는 가스통을 들고 시위에 나서려고 하는데 시신을 영안실에서 탈취해갔어요. 그 아이 어머니는 절대 못 내준다고 했는데, 부모와 얘기가 끝났다고 하니 더는 어쩌지 못했죠”
정일우 신부와 남은 40가구의 상계동 주민들도 성당을 떠나 1988년 1월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으로 향했다. 성당과 전국에에서 모인 성금으로 땅 850평을 마련했다. 하지만 고강동에 지은 임시 건물도 시에 의해 철거되고야 만다. 그곳 역시 올림픽 성화봉송이 지나가는 고속도로변이었기 때문이다.
“올림픽 성화가 지나가고 나서야 건축허가가 났어요. 그전까지 땅굴을 파 9개월간을 그 안에서 살았어요. 바닥에 비닐을 깔고 엄청나게 큰 천막을 사서 천장을 덮었는데 장마가 오면 힘들었지만, 생각보다는 살 만하긴 했어요.”
김동원 감독은 “상계동 주민들이 흩어지고 정일우 신부가 어떤 기분이었을 지는 나 역시 궁금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천주교가 당시 판단을 잘못한 거 같아요. 천주교는 땅 명의를 주민들 앞으로 옮겼고 결국 850평 땅을 40가구가 나누어 소유하게 됐어요. 성당에서 다른 지역으로 떠난 나머지 40세대 주민들도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죠. 사실 주민들은 그곳에서 살 수 있으면 되는 거였고 자립할 상황이 돼 나가면 다른 철거민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상계동 이후에도 김 감독은 꾸준히 도시빈민을 뷰파인더에 담았다. ‘행당동 사람들(1994)’, ‘또 하나의 세상(1999)’에 담긴 행당동 철거민들은 그가 그리던 이상적인 마을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상계동 올림픽’의 속편을 제작하려고 했던 김 감독은 지난해 발표한 ‘내 친구 정일우’가 그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예전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상계동 주민들과는 여전히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상계동 올림픽’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그의 카메라는 여전히 ‘버림받은 사람들’을 쫓는다. 언제 완결될지는 모르지만 비전향 장기수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송환(2003)’의 속편을 계속 찍고 있다.
“올림픽은 지금도 잘 안봐요. 스포츠를 별로 안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영화를 잘 만드는 편은 아닌데 잘하는 게 있다면 돈 없이도 만들어요. 요새도 카메라 하나 매고 버스 타고 촬영 다녀요. ‘송환’ 이후에 14년이지나 가장 젊은 할아버지가 85살인데.. 아무튼, 계속 찍고 있습니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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