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서울올림픽 30주년 특집1-‘키워드’로 살펴본 올림픽의 유산들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지 벌써 30년이 흘렀다. 서울올림픽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일요신문] 오는 9월 17일은 88서울올림픽 개최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IOC 총회에서 서울은 난적 나고야를 꺾고 스물 네번째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그렇게 시작된 기적은 본 대회를 전후해 서울을, 그리고 대한민국을 뒤집어 놨다. 더 나아가 서울올림픽은 냉전종식의 장으로서 세계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은 우리 현대사 속에서 전 분야에 걸쳐 획기적인 변화를 야기했다. 지금 우리는 서울올림픽이 남긴 유산에 둘러싸여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요신문’ 언더커버는 서울올림픽 30주년을 맞아 특집기획을 마련했다. 첫 번째로 ‘키워드’를 통해 서울올림픽이 남긴 여러 유산들을 알아봤다.
#마이카 올림픽
서울올림픽 이후 우리는 ‘마이카’ 시대를 맞이했다. 사진은 우리의 1세대 승용차 현대의 포니. 연합뉴스
한국은 어느덧 세계경제 무대에서 그 규모로 놓고 본다면, 열 손가락 안의 대국이 됐다. 서울올림픽은 그 중요한 기점이다. 서울올림픽은 우리 경제성장의 근간을 유산으로 남겨놨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니었다. 서울올림픽은 유례가 없는 경제성장의 이력을 남긴 1980년대 한국의 ‘절정’이었다. 80년대 초부터 이어온 3저 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 속에서 한국은 이 시기 10%대의 경제성장과 수출 호조, 그리고 중산층 형성에 따른 내수 호조까지 그야말로 대박을 이어갔다.
서울올림픽은 1964년 기록적인 흑자를 기록한 도쿄올림픽과 함께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흑자 올림픽으로 회자된다. 서울올림픽은 광고는 물론 복권 수입과 선수촌 분양으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다. 그 경제적 이득만 당시 금액으로 4300억 원 정도로 추산됐다. 냉전과 오일쇼크로 올림픽 개최 경쟁이 서서히 식어갈 때 즈음, 서울올림픽은 꺼져가는 올림픽 열기를 다시금 당기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서울올림픽은 곧 ‘마이카 시대’를 야기했다. 올림픽을 기점으로 형성된 중산층은 자가용 구입을 꾀했고, 레저스포츠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마이카는 올림픽을 전후한 한국의 경제성장사를 상징하는 핵심 키워드로 자리했다.
#탈냉전과 세계화
서울올림픽은 탈냉전의 장으로 기억되곤 한다. 사진은 서울올림픽 농구 준결승전인 미국과 소련의 경기. 연합뉴스
서울올림픽의 공식 주제가는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다. 실제 서울올림픽은 오랜 냉전 속에서 벽을 쌓았던 좌우 진영 간 손을 맞잡은 탈냉전 올림픽으로 회자된다. 그것도 냉전 최대 피해국이자 분단국인 한국의 수도에서 개최됐기에 더더욱 의미가 깊었다. 불과 4년 전 LA올림픽과 8년 전 모스크바 올림픽에선 미국과 소련을 대표하는 좌우 진영 간 반쪽짜리 올림픽으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을 찾은 동구권과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참가국들에게 서울올림픽은 쇼킹이었다. 북한 선전의 영향으로 한국과 서울은 그야말로 거지 때가 우글거리는 빈곤국으로 각인됐지만, 막상 한국을 찾은 이들에게 수도 서울은 그 번화함과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탈냉전과 거기서 비롯된 세계화는 서울올림픽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이다.
6.29선언을 준비하던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서울올림픽은 우리 정치사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마땅한 유산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이란 선물이다. 1980년대는 한국 경제의 중흥기였지만, 정치적으론 혼란기나 다름없었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이전 박정희 정권 당시부터 추진하던 올림픽 개최 숙원사업을 현실화시켰지만, 결론적으로 본인의 정치적 입지는 축소시켰다. 1980년 5.16이란 반민주적, 반인권적 악행을 감행했던 전두환 신군부는 1986년 ‘서울의 봄’ 이후 개헌을 약속하며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배경에는 올림픽 개최 영향이 적지 않았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앞서 광주 사례처럼 무지막지한 유혈진압을 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IOC는 물론 교황청에서도 올림픽을 앞둔 서울 내 일련의 소요사태에 대해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후문이다. 이를 의식한 듯,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수방사에게 올림픽을 앞두고 군복 대신 평상복 착용을 지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올림픽은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최첨단 스포츠의 시금석
서울올림픽 당시 최고의 단거리 스타였던 벤존슨은 한국의 과학기술원이 담당했던 도핑검사에서 약물복용이 발각됐다. 연합뉴스
스포츠와 과학의 결합은 이제 너무나 보편적이다. 스포츠과학이란 신학문이 자리한지 오래다. 이제 통계학과 IT, 그리고 첨단의학이 스포츠의 기록을 좌지우지한다.
서울올림픽은 그 최첨단 스포츠의 시작점과 다름없다. 이는 국내는 물론 국제 스포츠계에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단적인 예로 서울올림픽에 처음으로 육상과 수영 등 기록종목에 컴퓨터 계측 기술이 도입됐다. 0.01초 단위까지 칼같이 잡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모든 기록 데이터를 이전처럼 기록지로 보관한 것에서 벗어나, 이때 처음으로 컴퓨터에 저장 보관하기 시작했다. 스포츠 데이터베이스 기술의 시금석이었다.
이뿐 만이 아니었다. 서울올림픽에선 도핑 기술이 급성장하면서 스포츠의 공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는 도핑 검사를 도맡았는데, 단거리 육상스타 벤 존슨의 금지약물 사용을 잡아내며 세계적 명성을 얻기도 했다. 스포츠 중계기술에 있어서도 변곡점이 됐다. 당시 일본의 NHK는 세계 최초로 아날로그 HD 방식을 도입해 시범중계에 나섰다.
‘최첨단 스포츠 기술’은 서울올림픽이 남겨 놓은 중요한 자산이 됐다.
#전화카드 그리고 깨끗한 화장실
이제는 보기 어려운 전화카드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보급된 것이다. 연합뉴스
서울올림픽은 국내 생활 문화에도 다양한 유산들을 남겨 놓았다. 대표적으로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화카드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마그네틱을 심은 자기식 전화카드는 이때부터 주화를 대신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각종 자판기가 지하철을 비롯한 공공장소 곳곳에 설치되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그런가하면 서울의 공중 화장실이 올림픽을 전후해 그야말로 천지개벽했다. 아마 그 어떤 부분보다 피부에 와 닿는 변화였다. 비위생적이고 더러웠던 당시 국내의 공중 화장실들에 수세식 변기가 들어가기 시작하고, 세면대도 설치됐다.
서울올림픽은 평창올림픽이 KTX 서울-강릉선 시대를 야기한 것처럼 이때 새마을호 도입을 야기하며 철도 교통의 혁명을 이끌기도 했다. 새마을호는 올림픽을 1년 앞둔 1987년 7월 첫 운행을 시작했다. 그 정차역을 서울, 대전, 대구, 부선 등 네 곳으로 하는 쾌속 특급열차였다.
#‘올림픽 도시’ 송파구의 등장
1983년 잠실 메인스타디움 건설 현장(좌)과 2018년 현재의 송파구 전경 모습.
강남3구 중 하나이자 서울의 부촌으로 유명한 서울 송파구는 도시전체가 올림픽이 남긴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송파구가 이전의 강동구에서 분구된 것이 바로 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이다. 분구를 논의하던 초기엔 ‘올림픽구’란 이름이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
송파구는 이전에 성동구, 강남구, 강동구 등 행정구역을 오가는 변두리 지역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에 들어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을 비롯한 각종 경기장과 선수촌 아파트 등 도시건설 붐이 일면서 현재의 도시기반을 형성했다. 송파구 오륜동 역시 올림픽의 오륜기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현재 송파구는 올림픽 개최 이후 강남3구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됐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서울올림픽 30주년특집2-‘호돌이 아빠’ 김현 디자이너 인터뷰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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