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최 쪽과 주관 쪽, 무대감독 등의 책임 공방전
달하, 비취시오라 포스터
6일 오후 1시쯤 경북 김천시 삼락동 김천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근무 중이었던 조연출 박 아무개 씨(24•여)는 다음날 있을 창작 오페라 ‘달하, 비취시오라’ 준비에 한창이었다. 대공연장 무대는 가로 15m 세로 14m 크기의 冂자 무대와 가로12m 세로6m 짜리의 직사각형 상하이동식 승강 무대가 지상 7m 위에 합쳐진 구조였다.
박 씨는 무대 정면 벽과 승강 무대 사이의 8m쯤 되는 공간에서 소품 작업을 하고 있었다. 김천 경찰서 등에 따르면 박 씨가 사이 공간에서 작업을 하는 사이 김천시청 소속 무대 감독은 승강 무대를 지하로 내리라고 지시했다. 박 씨는 작업 결과물을 확인하려 뒤로 이동하다 승강 무대가 내려간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7m 아래로 추락했다.
김천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승강 무대를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김명선 인턴기자
이 사고로 박 씨는 안면이 골절됐다. 폐와 간 등 장기도 손상돼 과다출혈 상태로 경북대병원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그는 4일간 사경을 헤매다 결국 10일 오후 3시 30분쯤 숨을 거뒀다. 이 사고로 7일에 열릴 예정이었던 공연은 취소됐다.
이 공연은 김천시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한문위)가 주최했고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한문연)와 호남오페라단이 주관했다. 허나 그 누구 하나도 책임자라고 나서지 않았다. 유가족은 분노했다. 박 씨의 부친은 “무대감독이나 주최•주관 쪽이 먼저 우리에게 연락해 잘못을 인정하거나 진심으로 사과를 하지는 않았다”며 “아이가 마지막 숨을 쉬고 있던 상황에서 그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거나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고가 난 후 관련자들이 우리 아이에게 책임을 돌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공연을 주최한 김천시는 사고 뒤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도 따로 대응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김천시 관계자는 “사실 그 사고에 대해 잘 모른다”며 “김천시문화예술회관에서 일어난 사고이니 회관에 가서 구체적인 사항을 들어보라”고 말했다. 또 “좋은 사고가 아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것은 다들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김천시문화예술회관 관계자 역시 말을 아꼈다. 사고 당시 한 관계자에 따르면 공연장 관계자는 유가족에게 “박 씨가 홀로 무대에 올라가 사고를 당했으며 목격자는 없었다”고 말했다. 유가족은 “병원에 찾아와서도 문화예술회관 관계자는 무대감독이 무대 위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CCTV를 확인하니 분명히 무대에 있었다”며 “앞뒤 말이 계속 달랐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에 김천시문화예술회관 관계자는 “죄송하다고 얘기했고 말을 바꾼 적도 없는데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다. 조사가 진행 중이다. 문화예술회관 관장 등 총책임자 관련 사항은 경찰 조사 결과가 나오면 그때 밝히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김천시문화예술회관 전경. 김명선 인턴기자
공연을 공동 주최한 한문위와 공동 주관한 한문연, 호남오페라단 역시 사고 이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유가족은 사고가 난지 2주가 흘렀지만 호남오페라단을 제외한 두 곳으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사고와 관련한 게시물 하나 올라오지 않은 상태다. 안전 불감증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이 전무후무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두고 한 공연계 인사는 “우리나라는 안전사고가 일어나도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해결책도 항상 제대로 제시되지 않아서 통탄스럽다”며 “공연을 주최하고 주관한 쪽에서는 유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왜 그 사고가 발생했는지를 분석한 후 개선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씨의 유가족 및 지인은 “무대 책임자의 잘못으로 일어난 사고”라고 주장했다. 무대감독이 승강 무대를 내리기 전에 무대 위에 있는 박 씨에게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어야 했다는 것.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발행 공연장안전매뉴얼에 따르면 무대 시설을 설치하거나 해체하는 작업을 할 때에는 책임 기술자, 기술 감독, 제작 감독 등의 허가를 받지 않고 무대 지역에 출입하면 안 되는 까닭이다.
사고가 발생한 김천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무대 입구에 붙어있는 무대안전수칙. 김명선 인턴기자
사고가 난 김천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무대 입구의 벽에는 “모든 작업 및 시설물 사용 시 무대감독이나 대관 담당자와 협의 후 진행해야 한다”는 무대안전수칙 팻말이 걸려 있었다. 공연 관련자들은 무대를 오갈 때마다 이를 접하게 된다. 유가족은 “이번 사고의 실질적 책임자는 무대감독”이라며 “승강 무대를 내리라고 지시한 당사자 무대감독이 박 씨에게 아무런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그 결과 승강 무대가 내려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박 씨가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승강 무대가 아래로 내려가면 무대 중앙에는 가로 12m, 세로 6m의 빈 공간이 생긴다. 문체부 발행 무대시설 안전설계지침에 따르면 ‘추락할 가능성이 있는 무대의 경우 주변에 경고등•펜스 등 추락방지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김천경찰서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무대에는 안전장치가 없었다. CCTV로 당시 상황을 확인한 박 씨의 외삼촌은 “아이가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나는 순간 그대로 추락했다”며 “리프트 주변에 두 명의 안전요원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안전장비를 하지 않았고 둘 다 무릎을 꿇은 채 아래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밝혔다.
박 씨의 부친은 “진상 규명을 제대로 하는 동시에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분명히 밝혀내고 사고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천경찰서는 김천시문화예술회관 무대감독 송 아무개 씨(55)와 호남오페라단 무대감독 홍 아무개 씨(40)를 안전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20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 누구도 책임을 지겠다는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고 전해졌다. 김천경찰서 관계자는 “각자의 사정만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박 씨의 꿈은 성악가였다. 대학원 졸업 후 독일 유학길에 오를 예정이었다. 유학비를 한 푼이라도 더 준비할 요량으로 무대 조연출 일을 해오고 있었다.
김명선 인턴기자 line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