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파는 공간’에서 ‘인간관계 맺는 공간’으로 진화하는 독립서점 탐방기
최근 서점이 ‘책 파는 공간’에서 ‘관계 파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서점을 찾은 손님끼리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새롭게 인연을 맺고 있죠. 서점 주인과 손님들이 함께 술을 마시는가 하면, 주말에 모여 책을 만드는 모임도 있습니다. 독특한 문화는 독립서점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중입니다.
‘자발적 백수’라고 들어보셨나요? 독립서점 ‘퇴근길 책 한잔’의 주인 김종현 씨(35)는 대표적인 자발적 백수입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신촌에 작은 독립서점을 차렸죠. 책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탓에 돈벌이는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김 대표는 백수 생활을 청산할 계획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서점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인연을 맺어가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태릉입구역에 있는 독립서점 ‘지구불시착’.
김 대표처럼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독립서점이란 주인의 취향대로 꾸며진 작은 책방을 말합니다. 이들이 독립서점을 운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 대표를 비롯한 많은 서점 주인들은 ‘사람들과 모이는 게 좋아서’라고 답했습니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웃고 떠드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 독립서점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즐겨 찾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독립서점 ‘퇴근길 책 한잔’의 김종현 대표가 2일 오후 작은 사인회를 열었다.
2일 저녁 7시 강남 교보문고 앞 계단에서는 팬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의 팬 사인회였냐고요? 아닙니다. 사인을 받으려는 줄이 짧아서 연예인이 아님을 진작 눈치챘습니다. 하지만 기웃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독립서점 김 대표가 사인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김 대표가 운영 중인 ‘퇴근길 책 한잔’은 술 한잔을 하면서 책을 볼 수 있는 독립서점입니다. 서점에 있는 책의 90%가 독립출판물이죠. 사인회에서 만난 그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 사인회를 하게 됐다”며 “우리 책방은 열려 있는 공간이다. 아무나 와서 책도 읽고 간단히 술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영화와 음악과 술을 좋아한다”며 “이것이 내가 영화, 음악, 술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게 된 이유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책방에서는 술 번개 모임, 영화 상영회, 콘서트가 자주 열립니다. 그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홍 감독의 영화를 감상하는 모임도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인회를 찾은 한 팬은 “서점에서 만나 친해졌다. 모임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독립서점 ‘퇴근길 책 한잔’의 김종현 대표가 2일 오후 작은 사인회를 열었다.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대화를 하다가 새로운 모임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영화나 음악 얘기를 하다가 “어, 그 영화 좋아하세요?” “저도 그 공연 보러 가요”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친해진다는 것이죠. 김 대표는 “일이 있어서 서점 문을 닫아야 할 때가 있었는데, 손님들끼리 놀다가 책방 문을 닫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는 에피소드도 전했습니다.
김 대표는 “다들 ‘부자가 되라 부자가 되라’고 하는데 돈은 덜 벌어도 친구들끼리 모이듯이 사람들과 어우러져서 노는 공간을 계속 만들어가고 싶다”는 나름의 포부를 드러냈습니다.
독립서점 ‘책방, 생활의 지혜’ 전경. 고성준 기자.
이화여대 정문 앞 골목길.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작은 서점이 보입니다. 양 옆 옷가게보다 화려한 곳입니다. 전지혜 씨(여. 31) 가 운영하는 독립서점 ‘책방, 생활의 지혜’입니다.
전 대표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몇 달 전 독립서점을 열었습니다. 그는 “다른 독립서점의 캘리그래피 모임에 참여했었는데 정말 재미 있었다. 여기에 푹 빠져서 이런 모임을 운영하는 서점의 주인이 돼야 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독립서점 ‘책방, 생활의 지혜’ 벽 곳곳에 붙어있는 그림. 드로잉 클래스에 참여한 사람들이 직접 그렸다. 고성준 기자.
서점에 들어서자 벽 곳곳에 붙어있는 그림이 눈에 띕니다. 전 대표는 “사람들이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모임에 참여하기보다는 ‘힐링’하려는 목적으로 온다. 학업에 지친 학생뿐만 아니라 회사 생활의 고단함을 풀고자 오는 직장인들도 꽤 있다”고 했습니다.
전 대표는 ‘안아주는 드로잉 클래스’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기의 진솔한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리는 모임입니다. 그는 “소통하며 서로를 위로해준다는 뜻에서 ‘안아주는 드로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공간이 된다면 나도 참여하고 싶다”며 미소지었습니다.
그림책을 만드는 모임도 기획 단계에 있습니다. 전 대표는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들,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은 사람들,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일 것이다”고 밝혔습니다.
독립서점 ‘책방, 생활의 지혜’의 전지혜 대표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고성준 기자.
이어 전 대표는 “서점은 일종의 아지트다. 사람들끼리 둘러보다 얘기를 하고 그러다 취향이 비슷하면 모임을 통해 인연을 맺는 공간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쉽게 오갈 수 있는 자그마한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소망이다”며 웃어 보였습니다.
태릉입구역 주변에 위치한 독립서점 ‘지구불시착’.
지하철 7호선 태릉입구역 7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작은 책방 하나가 보입니다. 김택수 대표(48)가 운영하는 독립서점 ‘지구불시착’이죠. 서점에 들어서니 김 대표와 손님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독립서점 ‘지구불시착’에서 운영되는 소설 쓰기 모임 ‘하루만 하루끼’.
‘지구불시착’에는 특이한 모임이 있습니다. 여럿이 모여 직접 소설을 만들어보는 모임이죠. 이름하여 ‘하루만 하루끼’ 모임입니다. 김 대표는 “우리도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소설을 써보자는 의미에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했습니다.
‘하루만 하루끼’ 소설 쓰기 모임에서 제작한 소설.
사진 속 창필과 수진의 대화가 보이시나요? 종이 쪽지가 아닙니다. 분명 소설입니다. 짧은 소설도 즉석에서 뚝딱 만들어집니다. 김 대표는 “책 만들어 봤냐”고 물으며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학생부터 직장인, 그리고 주부까지 다양한데 모두들 상당히 재미있어 한다”고 했습니다.
김 대표는 “동네에서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이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며 “다음에 올 때 친구들 많이 데리고 와서 내가 이 공간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해 달라”며 기자를 향해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지구 불시착’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 때문인지 이곳에서 녹차라테를 마실 때는 하루의 고단함이 모두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서점 ‘지구불시착’에서 판매하는 녹차라테.
여러분 중 학교생활, 회사생활, 인간관계에 지치신 분들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오늘 저녁에는 독립서점에 한번 들러보는 건 어떨까요. 혹시 아나요. 여러분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김명선 인턴기자 line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