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은 1316년(충숙왕 3)에 사헌 규정의 벼슬에 있던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풍채가 괴걸하고 힘이 장사였다.
‘이 아이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
최원직은 아들 최영의 용력이 비상하자 그에게 손수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 최영은 글도 빨리 배웠지만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숙했다.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최원직은 고려의 조정이 부패한 원인이 사람들의 탐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최영에게 청렴 강직하라고 가르쳤다. 최영은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을 받으면서 고려 최고의 무사로 성장했다. 그는 청년이 되자 왜구를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우달치(于達赤:궁중 호위무사)가 되고 공민왕이 즉위했을 때는 안우, 최원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護軍:장군)이 되었다. 1354년에는 대호군이 되었다.
조일신은 고려말의 역신이었다. 고려의 대학자이자 문신인 이제현(李齊賢)을 시기하는 등 윗사람을 능멸했다. 사람들은 조일신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는 좌충우돌해 친원파의 핵심 세력이었던 기씨(奇氏) 일파와도 갈등을 일으켰다. 이에 고려의 대간들이 일제히 조일신을 탄핵했다.
“이놈들이 감히 나를 탄핵해?”
조일신은 대간들을 위협하고 정치를 전횡하려고 했다. 그러자 조일신에 대해 많은 대신들이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조일신은 조정의 관리들이 서서히 자신의 목을 조여 온다고 생각하자 자신의 일파인 전 찬성사 정천기, 최화상, 장승량, 고충절 등을 동원해 1352년(공민왕 1) 9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기철, 기륜, 기원, 고용보, 이수산 등의 친원세력을 암살하기로 모의하고 사병을 동원해 습격했으나, 기원만이 살해되고 나머지는 모두 달아났다. 기씨 일파의 제거에 실패한 조일신은 공민왕이 머물고 있던 이궁(離宮)을 침입해 숙직을 하던 관리들과 군사들을 죽이고 공민왕을 위협해 스스로 우정승이 되었다. 정천기를 좌정승에, 이권을 판삼사사로 삼게 한 뒤에 다른 부하들에게도 마구 벼슬을 내려 환심을 샀다.
“조정에서 어찌 벼슬을 조일신 일파에게 내린다는 말인가? 대왕께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
조일신 일파에만 벼슬이 내려지자 대신들이 일제히 조일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조일신의 급작스러운 벼락출세에 대신들이 변란을 일으킬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했다.
‘잘못하면 내가 암살을 당할지도 모르겠군.’
조일신은 역신이라는 소문까지 들려오자 긴장했다. 잘못하면 변란이 일어나 자신이 처형될 수도 있었다. 조일신은 대신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최화상을 살해했다.
“네, 네가 나를 죽이다니….”
최화상은 조일신이 자신을 칼로 찌르자 눈을 감지 못하고 저주했다. 조일신은 변란이 모두 최화상의 세력이 일으킨 것이라며 공민왕을 협박해 장승량을 비롯한 8명을 효수하고 정천기는 하옥시켰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조일신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같은 당파까지 모조리 죽인 잔인무도한 자였다.
‘참으로 무도한 놈이로다.’
공민왕은 조일신에게 이를 갈았다. 때마침 이인복(李仁復)이 조일신의 역적 행위를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공민왕은 이인복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의 참살을 결심하고, 행성(行省)에 나아가 김첨수 및 최영, 안우, 최원 등에게 비밀리에 그를 제거하라는 영을 내렸다. 최영은 호위 군사들을 동원해 조일신의 세력을 일망타진했다.
조일신은 고충절, 이권, 정을보 등 그의 일파 28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고려는 불과 6일 만에 조일신의 난을 평정했으나 피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조일신의 세력들이 목이 잘리거나 유배를 가고 부인과 딸들은 공신들의 노비로 전락했다. 최영은 호위무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일신의 역모를 진압하면서 호군이 되었던 것이다.
“홍건적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를 토벌하기 위해 고려에서 장수와 군사를 보내라.”
원나라 조정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최영은 공민왕의 영을 받아 유탁, 염제신 등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나라로 출정했다.
‘우리가 과연 원나라를 위해 명교와 싸워야 하는가?’
“홍건적이 온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고려를 침략했다. 홍건적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 이북을 무인지경으로 휩쓴 뒤에 순식간에 평양을 함락시켰다. 고려는 발칵 뒤집혔고 도읍 개성은 피난을 가는 수레와 백성들이 줄을 이었다.
“그대들은 어디로 피난을 가는가? 우리가 홍건적 따위를 두려워하면 갈 곳이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나를 따라 홍건적을 물리치라!”
최영은 피난 가는 백성들까지 동원하여 홍건적과 맞서 싸웠다. 고려는 위기에 빠졌으나 최영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한 끝에 4만 명의 홍건적을 격파했다. 공민왕은 최영을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에 임명했다가 해가 바뀌자 서북면도순찰사로 임명했다. 최영은 서북면의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장군 홍건적이 또 침략해 오고 있습니다.”
최영이 홍건적을 격파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1361년에 홍건적이 다시 고려를 침략했다. 이번에는 10만 명의 대군을 휘몰아 달려왔기 때문에 온 나라가 전쟁터로 돌변했다. 최영, 안우, 이방실 등 고려의 장군들은 또 다시 격렬한 전투를 전개했다. 홍건적은 순식간에 평양을 점령하고 이어 도읍 개성을 함락했다. 고려는 도읍까지 내주면서 남쪽으로 퇴각했다.
“홍건적에 우리 강토가 유린되고 있는데 퇴각만 할 것인가? 우리가 오랑캐에게 국토를 빼앗겨야 하는가? 너희들의 목숨을 나에게 맡기라! 한 놈의 적이라도 죽이고 죽어라!”
최영은 사자처럼 포효한 뒤에 장창을 휘두르면서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가 한 번 장창을 휘두를 때마다 홍건적이 피를 뿌리고 낙엽처럼 쓰러져 뒹굴었다. 장수가 선봉에서 싸우자 군사들도 사기가 충천해 맹렬하게 홍건적과 싸웠다. 개성 앞의 재령평야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 최영은 마침내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그들을 격파해 개성을 수복했다. 홍건적 10만 명은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북으로 퇴각했다.
“홍건적이 물러갔다!”
“와!”
“최영 장군이 홍건적을 격파했다!”
최영은 백성들과 공민왕으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어느 사이에 고려 최고의 명장이 되어 있었다.
난세에는 영웅이 태어난다고 하지만 고려말에 최영, 이성계 같은 영웅들이 등장하고 그와 함께 역신들도 잇달아 등장해 고려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1363년에는 김용(金鏞)의 난이 일어났다. 홍건적이 물러가고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김용은 1363년 순군제조(巡軍提調)가 되어 흥왕사의 행궁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우정승 홍언박 등을 살해했다. 김용은 이 음모가 실패하자 도리어 자신의 병사들을 토벌하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사로잡힌 자를 모조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용은 난을 주도했으면서도 1등공신이 되었다.
“흥왕사의 난은 김용이 주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김용의 음흉한 간계는 부하들에 의해 폭로되었다. 최영은 김용을 사로잡아 밀양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경주로 압송해 사지를 찢어 죽였다. 최영은 흥왕사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판밀직사사 평리를 거쳐 찬성사가 되었다.
나라가 망하려면 재앙이 잇따른다. 흥왕사의 난이 일어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가 덕흥군(德興君:충선왕의 셋째아들)을 왕으로 받들고 군사 1만 명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략해 왔다. 최영은 이성계 등과 함께 정주의 달천(獺川)에서 싸워 격파했다.
1366년 최영은 신돈의 참소로 계림윤으로 좌천되었다가 귀양길에 올랐다. 고려를 이끌던 노장 최영에게는 시련의 세월이었다.
‘이제 고려는 끝인가?’
최영은 귀양생활을 하면서도 고려를 걱정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최영이 귀양지에서 절치부심하고 있을 때 신돈의 전횡을 지켜보던 공민왕이 다시 정권을 잡고 신돈을 축출했다. 최영은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6년 만에 풀려나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
1374년 명나라가 제주도의 말 2000 필을 요구해 왔다. 공민왕은 제주도에 말을 보내라고 했으나 제주도에서는 300필만 보내왔다. 이에 최영은 염흥방과 함께 전함 314척과 군사 2만 5600명을 지휘, 제주도를 평정했다.
1376년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한 왜구에게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배하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때 최영은 노구를 이끌고 출정해 부여에서 왜구를 대파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