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청원 전수조사 결과 공개... 낙태 미프진 등 여성 인권 정책 추진 ‘답보’
청와대는 국민청원이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남다른 의지를 보였습니다. 장관들은 청원에 적극적으로 답변했고, 정부 기관들도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렇다면, 청와대의 약속은 지켜졌을까요? ‘일요신문i’는 청와대 국민 청원에 대한 전수 조사를 통해 ‘이행률’을 평가했습니다.
청와대 공식 홈페이지 ‘국민 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답변된 청원’ 메뉴가 있습니다. 청와대가 20만 이상의 추천수를 기록한 청원에 대해 답변한 내용을 정리한 공간입니다. 2017년 9월 25일부터 2018년 10월 19일까지, 청와대는 총 52개 청원에 대해 의견을 밝혔습니다.
52개의 청원 중엔 ‘디스패치 폐간’, ‘조두순 출소 방지’ ‘퀴어축제 반대’ 등은 청와대의 의지만으로 실현하기 어렵습니다. 헌법상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 사법부 독립의 자유, 집회 시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응원’ ‘경제민주화 청원’ 등은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했습니다. 청와대가 현실적으로 해결 가능한 청원으로 범위를 좁힌 까닭입니다. 청원 내용을 추려서 정리해본 결과 , 52개 중 총 47개의 청원이 남았습니다.
굵직한 이슈들이 청원에 가득했습니다. 초·중·고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히트 앤 런’ 방지법 등 여성 인권 관련 청원이 가장 많았습니다. 단역 자매 자살, 장자연 리스트 등 수사내용을 촉구하는 청원도 있었습니다. 가상 화폐 규제 반대, 미세먼지 방지 등 경제와 환경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는 청원도 보였습니다.
‘일요신문i’는 청와대가 강력한 의지를 보였고 청원 내용이 실현된 청원 내용에 대해 ‘O’으로 표시했습니다. 청와대의 의지가 약했고 진전이 없었던 청원에 대해서는 ‘X’로 기록했습니다. 청와대가 나섰지만 문제 해결에 시간이 걸리는 청원은 ‘유보’로 분류했습니다.
청원 내용 중 ‘O’는 10개, ‘X’는 26개, ‘유보’는 11개를 기록했습니다. 청원 이행률은 약 45%, 유보로 분류된 청원 내용을 포함하면 이행률은 21%로 더욱 떨어졌습니다. 물론 청와대가 모든 청원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정점의 권력이 ‘청와대’라는 점에서 아쉬운 결과인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청와대가 청원을 이행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2017년 11월 17일 청원자 A 씨는 북한 병사 귀순 사건 당시 “병사를 치료한 이국종 교수가 근무하는 권역외상센터의 처우가 좋지 않다. 중증외상센터에 적용되고 있는 의료수가를 적정한 수준까지 인상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청와대 청원에 대해 “청원에 답을 하기 위해서 현장을 많이 방문했다”며 “이국종 교수를 만나 3시간 동안 얘기를 자세히 들었다. 권역 외상 센터의 의료 수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실제로 복지부는 2018년 4월 24일 외상환자 진료과정을 외상센터로의 환자 이송, 외상센터 도착 초기 처치, 긴급 수술 등 5단계로 나누고 충분하지 못했던 의료행위에 대해 수가를 더 지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가 청원을 불이행한 내용이 더욱 많았습니다. 2017년 9월 3일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 당시 청원자 B 씨는 “청소년이란 이유로 보호법을 악용하는 잔인무도한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 반드시 청소년 보호법(소년법)은 폐지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조국 민정수석은 당시 “국민의 요청은 정당한 측면이 있지만 문제를 단순하게 한 방에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착오다”고 신중한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원 직후 인 2017년 9월 11일 관계부처에 소년법 개정과 학교 폭력 대책 마련을 지시했습니다.
약 11개월이 지났지만 소년법(가해자가 만 18세 미만이면 최대 형량을 20년까지로 제한) 개정은 요지부동입니다. 2018년 7월 3일 소년법 폐지를 요구하는 청원이 다시 제기됐지만 여성가족부와 법무부는 검토(?)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 인권과 관련된 청원은 대부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2017년 9월 30일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인 미프진의 합법화와 도입”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청와대 측은 “청원을 계기로 임신중절 법제도 현황과 논점에 대해 정부가 다시 살펴봤다.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등의 담당자들이 쟁점을 검토하고 토론했다”고 답변했습니다.
하지만 2018년 5월 경 법무부는 낙태죄에 대한 헌법소원 변론요지서에 “낙태는 성교는 하되 책임은 지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을 담아 일부 여성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습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이를 철회했지만 낙태죄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미프진 합법화 논의 역시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2018년 2월 23일 청와대 청원 게시판엔 “히트 앤 런 방지법(미혼부 책임법)”의 도입을 주장하는 내용이 올라왔습니다. 청원자는 “덴마크에서는 미혼모에게 아이의 아빠가 매달 약 60만 원 정도를 보내야 한다”며 “만약 보내지 않을 때에는 정부가 아이 아빠의 소득에서 원천징수해서 양육비를 지급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청와대는 “여성가족부가 최근 대지급제를 포함한 ‘양육비 이행지원제도 실효성 확보 방안’ 연구용역을 시작했다”며 “결과가 나오면 외국의 대지급제와 우리나라 양육비 지원 제도를 종합 분석해, 실효성 있는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여성가족부는 재정부담, 다른 부처와의 조율 문제 등 양육비 대지급 제도의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외에도 초․중고 학교 페미니즘교육 의무화, 몰래카메라 판매금지 등 여성 인권 관련 이슈는 20만 명 이상의 추천수를 받았지만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환경에 관한 청원도 이행률이 높지 않았습니다. 2018년 3월 24일 미세먼지가 이슈로 급부상했을 당시 청원 게시판엔 “중국발 미세먼지의 진상을 알려야 한다”며 “문 대통령이 중국에 대해 항의하고 산둥반도에 있는 공장들을 폐쇄하라고 말해달라”고 읍소했습니다.
2018년 3월경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정치국 위원과의 만남에서 한중 환경협력센터의 조기출범에 동의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한중 환경협력센터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구체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47개의 청원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청와대는 상당수의 청원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억울한 피해를 겪은 사람들의 유일한 소통 청구가 청와대 게시판입니다. 청와대가 이들의 간절한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