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연택 회장이라….
책상 위에 놓인 수첩을 바라보며 김형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수첩에는 이성귀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는 볼펜을 들어 황연택이라는 이름을 그 옆에 나란히 적어넣었다.
이성귀와 황연택, 현재로서 그들 두 인물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기자로서의 묘한 직감이 그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형진은 황연택 회장의 외동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황연택은 이미 팔십을 넘긴 고령이었다. 철저히 숨기고 살아 왔다던 노인의 말대로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기사를 쓸 무렵부터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났다지만 마치 모든 기록이 싹 지워진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가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사실조차 아직까지 불분명했다.
형진의 이마가 슬그머니 찡그려졌다. 황연택 회장을 만났던 오전 이후로 자꾸만 궁도(宮島)에서 살해된 강 마담의 벌거벗은 시체가 상기되고 있었다. 왠지 두 사건 사이에 35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는 뭔가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문득 제3의 이름이 떠올랐다. 오광태-국회의원 오현성의 아들 오광태. 행방이 묘연하다던 그 젊은 친구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했다. 형진은 누구에게 묻기라도 하려는 양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너편 책상에서 부장이 몸을 일으킨 것은 그때였다.
“어이, 이리들 좀 모여 봐.”
퇴근 시간이 지났어도 잡지사 안에는 아직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몇 명의 기자들이 어슬렁거리며 일어서자 형진도 수첩을 덮고 부장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자네들 혹시 이 사건 알아?”
부장은 그들 앞에 스포츠 일간지 하나를 내밀었다. 내일자 날짜가 찍힌 그 가판 신문의 한 귀퉁이에 붉은 사인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누군가가 소리를 내어 기사를 읽었다.
“여자 탤런트 S양이 나이트클럽에서…. 정신과 병원으로 실려가 요양 중?”
부장이 말했다.
“이상한 얘기지? 나이트클럽에서 신나게 놀던 아가씨가 갑자기 정신착란을 일으켰다는군. 웬만하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당사자가 근래 주목받던 신인 탤런트라는 거야.”
“글쎄요? 뭐 연예인이라면 약물 파티라도 벌인 것 아닐까요?”
“아니야. 기사에도 나왔지만 그런 혐의는 없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목격자들의 증언이라구. 종업원들의 말에 따르면 특실에서 남자와 단 둘이 있었다는데…. 성행위를 가진 흔적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직후에 실성한 채로 발견됐어.”
묵묵히 듣고 있던 형진은 성행위라는 단어에 혀를 찼다. 부장은 또 하나의 가십거리를 발견해냈다는 자만심으로 득의양양한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얘기죠? 그렇다면 섹스하다가 홍콩간 것도 모자라 아예 돌아 버렸다는 겁니까?”
동료 기자가 농을 던지자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들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부장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 그림 최경태 | ||
부장이 눈을 부라려댔다. 그들은 떨떠름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어차피 관심 밖의 내용인지라 형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가한 사람들은 당장 이것부터 조사해 봐. 어이, 김 기자. 이번 건은 김 기자가 맡는 게 어때?”
“제가…, 말입니까?”
또 나로군, 형진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부장은 믿는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나마 출장 취재가 아닌 게 다행이었다.
<#54>
“미영아, 괜찮니?”
친구가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미영은 우울한 표정만 지은 채 대꾸하지 않았다. 친구는 그녀를 대신해 열심히 푸념해대고 있었다.
“아유 참, 순 돌팔이라니까! 누구 신세 망치려고 작정을 했나? 악담을 해도 유분수지 살(煞)은 뭐고 마(魔)는 또 뭐야?”
살.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들은 도망치듯 점(占)집을 빠져나왔다. 두 번 세 번 확인해도 점괘는 마찬가지였다. 남편 때문에 사타구니가 썩게 되리라-점쟁이의 이야기로는 부적이나 굿으로도 피하지 못할 팔자란 것이었다.
두 여자는 지금 술집에 들어와 있었다. 테이블에는 위로의 뜻으로 친구가 병째 주문한 양주가 놓여져 있었다. 미영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스트레이트잔을 들이켰다. 힘겹게 입이 열렸다.
“만약…. 그게 사실이면 어쩌지?”
“사실? 어머머 얘, 농담이라도 그런 얘기는 하지마. 말이 되니? 아직 서른도 안된 여자가 어째서 사타구니를 썩힌다는 거야?”
“하지만 맞는 얘기일 수도 있잖아. 우리 그이 때문에 내가….”
그녀는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친구는 안쓰럽게 미영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박미영. 내 생각엔 그저 너랑 남편이랑 속궁합이 안맞는다는 얘기를 그렇게 한 걸거야. 그렇잖아. 솔직히 너희 부부 섹스가 영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그나마도 점점 뜸해지구.”
“그냥 그런 걸까? 점쟁이가 말한 게 그런 뜻일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친구가 넌지시 물었다.
“미영아, 정 그렇다면 너 혹시….”
“왜?”
“에이, 됐어. 관두자.”
“아냐. 말해 줘.”
미영은 심각한 눈빛이었다. 그러자 마주앉은 친구의 얼굴에 은밀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있잖아. 나도 무심결에 말을 꺼낸 건데…. 너 말이야, 그럼 다른 남자 한 번 만나 볼래?”
“다른 남자?”
“그래. 만약 점쟁이 말이 틀린 게 아니라면, 미영이 넌 결국 남편 물건하고는 인연이 없다는 뜻이잖아? 어차피 너희 남편도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는데. 말하자면 그것도 멀쩡한 그곳을 썩혀 두는 셈 아니니?”
“그, 그래서…?”
일순 당황했지만 미영의 눈동자는 자신도 모르는 새 흔들리고 있었다. 친구는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 방법은 간단하지. 썩히지 않으면 되는 거라구. 말 그대로 가랑이가 안썩으려면 어쩌겠어? 그렇다고 이혼이라도 할 거야? 미영이 너만 좋다면 내가 근사한 남자를 소개시켜 줄게. 뒤탈 없는 확실한 남자로.”
글쎄다. 그 말투는 유혹이라기보다 교묘한 비책처럼 들리고 있었다. 귀밑이 달아오른 미영은 아무 말도 못하고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나도 니가 친구라서 이러는 거야. 너도 한창 재미 볼 나이인데 이러고만 있을래? 아무리 유부녀지만 요즘 세상에 애인 하나 없는 여자가 어디 있니? 게다가 미영이 넌 얼굴도 괜찮지, 애도 안가져봤으니 처녀 몸매지, 알고 보면 남자들이 줄을 선단 말이야.”
미영은 그 순간 무심코 고개가 끄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못이기는 척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술집 안의 몇몇 남자가 여자뿐인 그녀들에게 유심한 눈초리를 던지고 있었다.
“손해볼 거 없잖아. 안그래? 일단 보고 마음에 안들면 그냥 안만나도 되는 거니까. 만약 만나더라도, 들키지 않게 조용히 즐기면 되는 거구.”
“그래도…, 그래도 괜찮을까?”
“뭐 어떠니? 어차피 남편이 못해 주는 일을 대신 해소하는 것뿐인데. 그러고 나서 신랑한테 더 잘해 주면 서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냐? 이러지 말고 우리 쇠뿔도 아예 단김에 빼자. 이번 주말에 시간 있지?”
“이번 주말에?”
미영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져갔다. 그러나 거절의 표현은 끝내 흘러나오지 않았다. 결심을 재촉하듯 유부녀들의 술잔이 맞부딪쳤다.
<#55>
킬킬킬…. 나지막한 키들거림이 허공에 울려퍼졌다. 귀신이 웃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광태의 자포자기한 웃음소리였다.
그는 불 꺼진 오피스텔의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커먼 유리창만이 집어 삼킬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너였어. 니가 올 줄 알았어.”
오광태는 시뻘건 눈자위를 굴리며 뇌까렸다. 그는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마침내 환청이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흐흐흐, 이곳 아주 마음에 들어. 근사한 장소야.’
“왜 돌아왔지? 뭣 때문에 다시 나타난 거야?”
‘왜 돌아왔느냐고? 나에게 묻는 건가?’
그래, 너에게 묻는 거야-오광태가 이를 갈아댔다.
‘그건 니가 더 잘 알 텐데, 오광태?’
목소리는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차갑고 강력한 냉기를 뿜고 있었다.
“나는 약속을 지켰어. 니가 시키는 대로 물건을 잘랐다구!”
‘호오…. 꽤 당당하시군 그래.’
하지만 말과 달리 오광태의 손끝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손에는 아직도 고통과 함께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이 모두가 더 이상 악몽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귀신은 아량을 베풀 듯 짧게 말했다.
‘잊지마. 니가 벌레들의 주인이 된 건 내 덕분이야.’
“그, 그래서?”
‘고통을 맛보게 해 줄까?’
헉, 숨을 멈춘 오광태는 재빨리 사타구니를 감싸쥐었다. 벌거벗은 하초(下焦) 위로 서늘한 비수가 그어지는 것 같았다.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난 그는 다급해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 뭘 원하는 거야? 나한테 뭘 원하냐구!”
‘대답해봐. 내가 준 능력을 되찾고 싶지?’
그의 고개가 허겁지겁 끄덕였다.
‘그렇다면 명심해. 나는 너의 주인이야. 너는 내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기묘한 비웃음이 텅 빈 암흑을 가르고 있었다. 목소리가 명령했다.
‘너의 씨앗을 기다리고 있는 벌레들이 있다.’
“씨앗?”
‘그래. 나는 씨를 원해. 이제부터 씨를 뿌리는 거야, 오광태.’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