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김형진은 깊은 숨소리를 흘렸다. 잠을 깬 그는 무의식적으로 침대 위를 돌아보았다. 아내 미영은 이미 일어나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뒤숭숭한 머리를 흔들며 방문을 열었다. 아내는 부엌에 있었다.
“어젯밤에는 어떻게 된 거야?”
형진은 식탁 의자에 앉아 헛기침을 했다. 그의 시선은 무심코 실내복 치마 아래에 드러난 그녀의 뽀얀 종아리로 향했다. 스타킹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등을 돌린 아내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싱크대 위의 그릇들만이 조용히 달그락거렸다.
“회식이라더니 선생님들하고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미영은 자기 암시라도 하듯 그 부분을 강조했다. 그녀는 애써 떨리는 음성을 감추고 있었다.
“그럼 전화라도 줬어야지. 걱정했는데.”
형진이 핀잔을 던졌다. 문득 그릇 소리가 멈췄다.
“미안해요. 하지만….”
침묵 끝에 미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신도 그럴 때가 있었잖아요.”
“그럴 때라니?”
“집에 안들어온 적 말이에요.”
“그건 일 때문이었어, 여보.”
“저도 그래요. 저한테도 일이 있었어요. 그것뿐이에요.”
그녀의 냉정한 말투에 형진은 머쓱히 눈을 껌벅였다. 그는 아내의 입술이 하얗게 깨물리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당신이 그렇다면…, 저도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미영은 화를 냈다. 자신이 그럴 만한 입장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오히려 그 때문에 화를 내고 있었다.
불만 쌓인 아내들이 누구나 그러는 것처럼 그녀의 어깨 너머로 설거지 소리가 높아졌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는 그 표현에 형진은 더 이상 말을 걸 수 없었다.
▲ 그림 최경태 | ||
혹시 아이 때문은 아닐까. 형진은 생각했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 아이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엄마’가 된 미영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그리 행복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라서는 아니었다. 반대로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두려운 탓이었다. 형진은 애비도 모르는 놈이란 소리를 듣던 어린 시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월요일 저녁이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지만 주말의 그 사건들은 아직도 그에게 개운치 않은 기분을 남기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일에 열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형진은 이마를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몸은 푹신한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호화로운 실내장식 너머로 초대형 TV화면이 한쪽 벽을 메우고 있었다. 생소한 그 장소는 특급호텔의 나이트클럽 안이었다. 얼마 전 부장이 취재를 지시한, 신인 탤런트 S양이 정신과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바로 그 특실 안이었다.
이 위에서 정사가 벌어졌었겠군, 그는 떨떠름히 소파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룸의 문이 열리더니 턱시도를 차려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두 사람은 명함을 주고받았다. 남자는 나이트클럽의 지배인이었다.
“바쁘실 텐데 취재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뭐 한두 번도 아니라서요.”
지배인의 시큰둥한 말투는 기자들이 꽤나 분주히 들락였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는 형진이 무슨 말을 꺼낼지 뻔히 안다는 양 자리에 앉자마자 선수를 쳐댔다.
“근데 미리 말씀드리지만 S양에 관해서는 저희도 별로 해드릴 얘기가 없습니다. 그날 있었던 사고도 이런 데에서는 워낙 흔한 일인지라….”
형진은 예의상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흔한 일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에 멤버로 오시는 분들이 보통 사람들도 아니고…. 젊은 손님들이기는 해도 대부분 한가락 하는 집안 자식들이니까요. 싸움이라도 나면 모를까, 저희 종업원들은 손님들이 뭘 하시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지배인은 마치 자기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처럼 과시하는 표정이었다. 형진이 반문했다.
“그날 같은 일이 생겨도 그렇습니까?”
“솔직히 어쩔 수 없죠. 안에서 콩을 까든, 돌림빵을 하든, 자기들끼리 여자 끌고 와서 하는 짓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S양 정도는 약과예요. 그보다 더한 짓거리가 벌어지는 적도 많습니다.”
형진은 짐짓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이 특실에서 S양과 함께 있었던 손님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있을까요?”
대답을 짐작하고서 던진 질문이었다. 역시나 지배인의 표정이 금세 딱딱해졌다.
“죄송하군요, 기자님. 규칙상 손님 신분은 절대로 밝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배인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제 영업시간이라서요. 더 물어 보실 게 있습니까?”
형진으로서도 딱히 물을 말이 없었다. 지배인을 따라 일어서던 그는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실례지만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듣자니 웨이트리스 한 사람이 목격자였다던데요?”
“아, 그 계집애요? 걔는 며칠 전에 관뒀습니다.”
“그만뒀다고요? 왜죠?”
“실은 해고당했습니다. 품위 손상 문제로요.”
“품위 손상이요?”
지배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곤란하다는 인상이었으나 영업상 비밀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저희 업소 이미지 때문에 얘기하기가 조금 그런데…. 글쎄 그년도 미쳤는지 다음날 영업시간에 손님하고 룸에서 그짓을 하다가 걸렸더라구요. 그것도 남자 셋하고 한꺼번에 했다나 뭐라나? 하여간 그래서 잘렸습니다.”
형진은 의외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건 장소에는 S양과 웨이트리스 두 여자가 있었다. 한데 그 중 한 사람은 정사 중에 정신착란을 일으켰고, 나머지 한 사람은 정신나간 채 공공장소에서 정사를 벌였다니 우연의 일치치고는 뭔가 기이했다.
취재는 그 정도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형진은 떠밀리듯 룸을 빠져나왔다. 이른 시간임에도 나이트클럽 안은 쿵쾅거리는 음악소리와 함께 서서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늘씬한 몸매들이 30대인 그를 멸시하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형진은 위화감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입구 쪽에서 들어서던 화려한 옷차림의 젊은이들과 그의 어깨가 우연히 부딪쳤다. 미안합니다-고개를 꾸벅이던 그는 순간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누구지? 형진은 그 얼굴을 어디서 본 듯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젊은 남자의 뒷모습은 이내 어두침침한 나이트클럽의 조명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 무리의 깔깔거리는 아가씨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71>
러브호텔의 네온사인, 커다란 더블베드, 그리고 구겨진 스커트. 박미영은 텅 빈 교실 창가에 서서 어둠이 깔린 교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벗기던 남자를, 여관방 한가운데서 벌거벗고 있던 그 남자의 몸매를 떠올렸다. 그의 손길이 자신의 알몸 구석구석을 스쳤다고 상상하니 오싹하면서도 왠지 야릇한 감정이 들고 있었다.
만약 그때까지 내가 정신을 잃고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미영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아니 정신을 잃지 않았더라도 만약에-두 눈이 질끈 감겼다. 상상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배 위에 얹혀진 두 손을 발견했다. 애써 부정하려 해도 저 멀리 깊숙한 곳이 자꾸만 젖어들었다.
찰라 미영은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거렸다.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녀의 망설이는 손길이 전화기의 액정화면을 열었다. 친구의 전화번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모텔의 그 이혼남을 소개시켜 줬던 친구였다. 유혹은 이미 피할 수 없는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72>
“아아, 맙소사! 아아…!”
여자의 신음소리가 잇달아 터져나왔다. 여자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타누르고 있는 남자의 얼굴과, 그 남자가 쉴 새없이 허리를 들이밀고 있는 자신의 허벅지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허공에 치켜든 한 쌍의 종아리가 안타깝게 허우적거렸다. 환한 조명이 두 사람의 벌거벗은 몸뚱아리를 비추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여자만 벌거벗었을 뿐 남자 쪽은 거의 옷을 벗지 않고 있었다.
호텔방 안이었다. 지하에 회원제 나이트클럽을 갖춘 호텔이었다. 남자-오광태가 그 여자를 타락시키는 데에는 불과 십여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번거로운 수고를 덜기 위해 아예 나이트클럽의 웨이트리스에게 방을 예약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윗층으로 올라와 뒹굴고 있었다.
여자는 30대 초반의 유부녀였다. 그것도 여성지 따위에 심심치 않게 이름이 오르내리는, 재벌그룹 2세의 아내라고 했다.
“자기야, 지금이야! 지금!”
여자의 땀에 젖은 나신이 활처럼 휘어졌다. 격렬한 기운을 받아들인 유부녀가 온 몸을 바들거렸다.
그러나 오광태는 절정의 그 순간에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딴 생각에 빠져 있었다. 몇 시간 전 우연히 스쳐간, 한 사내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는 그 사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사내가 자신을 뒤쫓기 시작했다는 것도 예감하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에게 유부녀가 희열에 찬 얼굴로 재빨리 지껄였다.
“자기야. 우리 연애하자, 응? 원하는 건 다 해줄게. 자동차 갖고 싶어? 아파트 어때?”
오광태는 대꾸하지 않았다. 바닥에 뒹굴던 옷가지를 뒤진 여자는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우리 남편은 신경쓰지 않아도 돼. 그 새끼도 나 몰래 할 짓 다 하니까. 자기만 좋다면 내가….”
유부녀가 배부른 푸념을 해대며 몇 장의 수표를 내밀었다. 여자의 핸드백을 나꿔챈 오광태는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그는 핸드백 안에서 자그마한 종이 상자를 끄집어냈다.
“이걸 썼나?”
“뭐 말이야? 피임약? 후후, 나는 남자가 하는 게 싫더라. 그래서….”
여자의 나불거리는 목소리는 거기까지였다. 오광태의 입술이 히죽 말아올려졌다. 하지만 그 웃음은 결코 호의의 의미가 아니었다.
재벌 2세의 아내는 남자가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이어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나신이 침대 위에 나동그라졌다. 여자는 뺨을 감싸쥔 채 숨을 헉헉거렸다. 얼굴 절반이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것 같았다. 입술이 터져 왈칵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광태를 쳐다본 유부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공포로 휘둥그레졌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서 뱀처럼 긴 가죽끈을 천천히 풀어내고 있었다.
“너는 벌레야. 알고 있지?”
그녀는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따라 해. 저는.”
오광태가 말했다.
“저, 저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벌을…, 벌을 받아야 합니다.”
유부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더듬거렸다. 침대에 엎드린 그녀의 엉덩이가 한껏 뒤로 내밀어졌다.
휙, 오광태의 허리띠가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유부녀의 등에 시뻘건 무늬가 그려졌다. 여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철썩, 철썩…. 그녀가 기절할 때까지 허리띠가 계속 내리쳐졌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