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서 뒤처지면 폭언·폭행, 좋은 사위 맞으려 미대 진학 강요, 화목한 척 가족 해외여행…두 번이나 자살 시도
지난해 11월 집을 도망 나와 홀로 살고 있는 A 씨(여·37)의 발언이다. A 씨 주장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부터 부모의 지속된 폭력과 각종 강요·협박 등에 시달려야 했다. 30대가 돼서도 부모의 핍박은 그치지 않았다. 반항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남의 시선을 과도하게 신경 쓰는 부모는 A 씨의 진로·교우·연애 등 모든 생활을 자신들의 바람대로 통제했다. 취직한 뒤에도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틈틈이 일할 것을 강요했다. 부모의 그릇된 욕심과 가치관이 야기한 일명 ‘현대판 가정폭력’이다.
그러다보니 A 씨의 어머니는 자신의 자녀들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로 비춰지길 바랐다. 하지만 A 씨는 어릴 적부터 쌍둥이 친언니와 남동생과 비교해 공부를 잘하진 못했다. 어머니에게 A 씨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A 씨는 초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폭행·폭언을 숱하게 당했다. A 씨 주장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 다니거나 허벅지와 어깨 등 신체 일부를 발로 차이고 손으로 얼굴을 수차례 맞곤 했다. 학업성적이 좋지 못하거나 부모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폭행의 이유였다. 친언니와 남동생은 A 씨가 맞는 모습을 보며 겁에 질려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A 씨를 향한 가정폭력의 시작이었다.
폭력은 점점 심해져 자매·남매 사이의 차별로 이어졌다. 고등학교 입학 후 A 씨는 일상까지 통제당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A 씨의 친구를 감시하며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와는 어울리지 못하도록 한 것. 친구 아버지의 직업 등을 묻는 경우도 허다했다. A 씨는 폭행·폭언이 두려워 어머니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A 씨의 오랜 친구는 “아버지가 의사인데 저 따위와 어울리냐며 친구를 못 사귀게 하는 경우가 많았고, A 씨에게 수시로 전화와 문자로 집에 빨리 들어올 것을 강요했다”고 진술했다. 친언니나 남동생에 대한 간섭은 없었다.
A 씨가 대학교에 진학하던 당시, 어머니는 공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A 씨에게 미술을 전공할 것을 강요했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위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A 씨는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미술·예술 관련 학과를 공부해야만 했다. 졸업 후 A 씨는 미술관·박물관 등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A 씨의 어머니는 자신이 소유한 상가 2층에 A 씨 명의로 갤러리를 오픈하기도 했다. 자신의 가정과 딸을 남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매출은 일절 없는 이른바 ‘유령 갤러리’였다. A 씨는 직장을 다니며 갤러리를 운영할 시간도,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A 씨는 어머니에게 보증금 2000만 원과 월세 20만 원을 매달 지불해야만 했다. 돈이 넉넉지 않았던 A 씨는 허리를 졸라매야 했다.
A 씨와 어머니가 맺은 부동산 임대차 계약. A 씨는 지난해 말 집을 도망 나오자마자 갤러리 폐업을 신청했다. 왼쪽은 부동산임대차계약서, 오른쪽은 폐업사실증명서.
이후 A 씨는 어머니의 강요로 수없이 많은 맞선자리에 나갔고, 자유로운 연애는 불가했다. A 씨에 따르면, 맞선에서 만난 남성에게 거절당할 때마다 A 씨는 어머니로부터 폭언을 들어야만 했다. 당시 맞선에 나왔던 한 남성은 “처음 A 씨를 봤을 땐 철저히 지시에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였고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문자와 전화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옷차림, 화장도 40대로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단란한 가정으로 보이기 위해 호화로운 여행을 계획, 떠날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항공, 호텔 예약 등 잡다한 업무는 모두 A 씨의 몫이었다. A 씨는 “좋은 호텔, 비싼 음식, 이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고 어머니는 내가 친언니의 시중을 들며 서로 좋은 자매인 척하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A 씨는 초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는 내과의원에서 각종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했다. “밥 값은 해야 하지 않겠냐”는 어머니의 강요에 따른 사실상의 노동착취였다. 이는 취업한 뒤에도 지속됐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병원 수익을 올리기 위해 A 씨 명의를 도용, A 씨 앞으로 수백 건의 허위 진료·처방을 일삼았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일요신문은 지난 10월 20일 <‘친딸 앞으로 수백 건 허위진료·처방’ 부산 한 내과에서 벌어진 일> 기사를 단독보도하며 이를 지적한 바 있다.
A 씨는 “병원수익도 목표였겠지만, 친언니 등의 질환을 내 앞으로 돌린 것이기도 하다”며 “요즘 지위 있는 사람끼리 결혼할 때 건강보험내역 등을 서로 떼어 교환한다. 헌데 치질처럼 부끄러운 진료 기록은 상대 남자에게 좋게 보이지 않는다. 이를 염려해 친언니의 일부 질환을 나한테 돌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A 씨는 칼로 손목과 팔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사진은 자살시도 흔적.
A 씨는 지난 8월 어머니를 폭행·감금·강요·공갈죄로, 아버지를 손괴·공갈죄로 고소했다. A 씨의 고소대리인 변현숙 법무법인 한올 변호사는 “자녀에 대한 이 정도 수준의 폭력과 강요는 비상식적”이라며 “숱한 자살시도와 우울증 증세, 갤러리 임대차 계약, 허위진료 기록 등은 A 씨가 당한 가정폭력을 상당부분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A 씨의 어머니는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습권을 박탈하거나 폭행하거나, 병원에서 일을 시킨 적은 없다”며 “갤러리는 딸이 줄곧 미술학원 등을 열고 싶어 해 내가 소유한 상가에 마련해준 거다. 처음엔 돈을 안 받으려 했으나 딸이 그건 아니라며 나한테 보증금, 월세를 냈다”고 설명했다. 또 “자식들을 편애할 이유가 없다. 딸의 경우 몸이 약해서 신경을 더 기울였는데 본인은 이를 부담·간섭으로 느낀 듯하다. 자살기도를 한지도 몰랐고 그런 조짐이나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며 “딸이 무단가출을 한 것이 너무 안타깝고 당혹스러우며 우린 오히려 딸을 건강하게 다시 데려오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편, 전문가들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강요 또한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봉석 성균관대 사회학과 초빙교수는 “부모가 자신의 의사를 앞세워 자녀의 인생을 결정, 규정하는 등의 행위는 넓은 의미에서 폭력이 될 수 있다”며 “이것이 지속되고 심화될 경우 물리적 폭력과 반응을 가져올 수 있고, 최근 이와 비슷한 사건·사고가 적지 않게 관측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