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판결이냐’주심판사 환청
▲ 검찰은 'k순경사건' 이후 백서를 제작하는 등 '과오'를 씻기 위해 철치부심했다. | ||
허위자백이란 수사를 받는 피의자가 거짓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범죄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간혹 영웅 심리가 발동해 허위자백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수사기관의 압박을 심리적으로 견디지 못해 허위자백을 하는 게 대부분이다.
법조계에서는 허위자백 사건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지난 1992년 11월에 발생한 K순경 사건을 꼽는다. 이 사건은 살인 혐의 피의자로 몰린 K순경이 실제 살인을 하지 않았으나 ‘폭행치사로 혐의를 낮추어주겠다’는 경찰의 회유를 못 이기고 자신이 살인을 했다고 허위자백을 했다가 검찰과 법정에서 실제 살인자로 몰린 사건이다.
일이 꼬인 것을 알게 된 K순경은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결백을 주장했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였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 열흘 전에 진범이 잡혀, ‘무죄’라는 보기 드문 명판결(?)이 내려지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복잡한 ‘스토리’가 전개됐던 만큼 사건이 가져다준 상처는 너무나 컸다. 엉겁결에 허위자백을 하다 살인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쓴 K순경은 그 후유증으로 백혈병까지 걸리는 불운을 겪었으며, 이 허위자백에 놀아난 검찰과 법원도 망신을 당했다. 특히 당시 최고의 강력계 검사를 사건에 투입시켰으나 오히려 스타일만 구긴 검찰은 ‘K씨 사건을 계기로 본 강력사건의 문제점’이라는 1백23페이지짜리 백서를 제작하는 등 치명적인 ‘과오’를 씻기 위해 한동안 절치부심했다.
이 사건은 1992년 11월29일 아침 서울 관악구 신림동 A여관 203호에서 카페 종업원 이아무개양(18)이 목이 졸려 숨진 채로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사건을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이양과 함께 그날 새벽 3시30분쯤 여관에 투숙했던 B파출소 소속 K순경이었다. K순경은 경찰에서 “오전 7시쯤 혼자 여관을 나가 인근 파출소에 출동했다가 오전 10시쯤 이양을 깨우기 위해 여관방으로 돌아와 보니 이양이 숨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K순경은 범인으로 지목돼 구속되고 말았다. 사건 수사를 지휘한 검찰은 “K순경이 여관방에서 출근했다가 이양이 여관에 있는지 전화로 확인도 하지 않고, 이양을 깨우기 위해 10시에 돌아왔다는 게 어색하다”며 그의 범행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K순경과 이양이 결혼 문제로 갈등을 겪어왔고 ▲이양이 K순경의 아이를 낙태한 사실도 그가 범인으로 지목될 만한 이유였다. 투숙 당시 ‘아침 8시에 인터폰을 해달라’는 K순경의 부탁을 받은 여관 주인이 실수로 7시에 인터폰을 했으나 K순경이 즉시 응답을 한 점도 그와 사건을 연결시킬 수 있는 주요한 대목이었다.
결론을 먼저 얘기하자면 이 사건의 범인은 따로 있었다. 재수생인 S군이 낮에 여관 열쇠를 훔쳐, 밤새 당구장 등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이날 아침 7시께 훔친 열쇠를 이용해 이양이 자고 있던 여관방에 몰래 잠입했다. S군은 핸드백에서 수표를 훔치다가 이양에게 들키자 침대로 올라가 이양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말았다. 진상과는 다르게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K순경을 범인으로 지목한 검·경의 수사 결과에서 눈여겨볼 점은 법의학적 소견이다. 경찰의 시신 감식 결과, 이양 시신의 시강(사체 경직 현상)이 전신에 걸쳐 나타난 점이나 위 내용물의 소화 정도, 직장의 온도 등으로 미루어 사망시각은 오전 5시 이전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이 같은 법의학적 소견과 오전 7시에 여관을 나갔다는 K순경의 진술을 근거로 K순경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던 것이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수사관들은 법의학적 소견을 내세우면서 약 이틀간 K순경을 압박했다고 한다.
“이양의 사망시간이 새벽 3시에서 5시로 나왔어. 오후 1시 반에 잰 이양의 직장 온도가 24도래. 사망한 지 10시간이 경과됐다는 계산이야. 이양의 위 속에서 뭐가 나왔는지 알아? 새벽 1시경에 먹었다는 음식이 그대로 나왔어. 음식을 먹은 지 3시간쯤 지나면 그렇게 된다는 거야. 자네도 경찰관 생활을 해서 알겠지만 빠져나가긴 힘들 것 같은데….”
K순경은 도저히 결백을 입증할 만한 길이 보이지 않자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 상황에서도 수사진은 회유와 압박이라는 카드를 번갈아 내세우면서 K순경을 옥죄어갔다.
결국 수사진은 “살인이라도 실수라고 인정되면 과실치사나 폭행치사가 되어 집행유예까지 받는 경우도 있다”, “솔직하게 털어놓기만 하면 폭행치사로 만들어 주겠다.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 피의자를 이처럼 대접하는 것도 자네가 동료 경찰이니까 그러는 거야”라며 은근히 허위자백을 종용했다.
더 이상 부인을 할 힘조차 없던 K순경은 결국 허위자백을 하게 된다. K순경 나름대로는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살인과 폭행치사는 수사관 말대로 하늘과 땅 차이로 배웠고, 폭행치사죄는 합의만 하면 집행유예도 가능한 사건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일단 허위자백이 시작되면서 수사 속도는 무척 빨라졌다. 막히는 부분이 있을 경우에는 K순경의 과거 경험 또는 현장에서 수사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섞여졌다. 피의자 신문조서가 무려 7차례나 변경, 작성됐을 정도로 내용이 다듬어진 후 최종적으로 범행 내용이 확정됐다.
“피의자(K순경)는 1992년 11월29일 03:30분경 신림6동 여관에 이양과 함께 들어가 목욕을 한 후 성교를 1회 했다. 성교를 한 후 04:00경 피의자가 다시 성교할 것을 요구하자 이양이 거절하여 피의자는 화가 나 손으로 그녀의 턱 부분을 1회 때렸다.
이에 이양이 피의자에게 화를 내며 ‘당신이 뭔데 나를 때리느냐, 결혼도 하지 않을 것인데, 왜 자꾸 성교를 요구하느냐’고 하자, 피의자도 ‘결혼하여 딸을 낳으면 너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고 악담을 하는 등 맞섰다.
이때 피의자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격분하여 순간적으로 이양 상체에 올라타 양쪽 무릎으로 팔을 누르고 왼손으로 이마를 누른 채 오른손으로 입을 막았다. 피의자는 맨손으로 이양의 입을 막으니까 이양이 자신의 손바닥을 물려고 하여 성교할 때 접어둔 휴지조각으로 입과 코를 동시에 짓누르면서 힘을 가하였다.
그 후 1분 정도가 지나 이양이 일어나지 않고 얼굴이 창백해져 숨을 안 쉬기에 당황한 피의자가 인공호흡을 시킨 다음 가슴을 양손으로 눌러 보았으나 숨을 쉬지 않았다. 놀란 피의자는 이양이 죽은 것으로 알고,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이양의 핸드백, 점퍼, 치마 등을 욕조에 던져 놓고 베개 두 개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이양 지갑에 있던 수표 중 3매를 빼내어 가지고 여관에서 나와 택시를 탄 피의자는 수표가 추적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수표를 택시 창 밖으로 모두 던져버렸다. 화장실에 있던 휴지는 변기에 넣어버렸다. 이양의 목에 걸린 목걸이는 빼서 여관 책상 서랍 위에 놓았다.
피의자는 현장을 수습한 후 07:10분경 S파출소로 복귀해 일을 하던 중, 10:10경 여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밖에서 20대 남자가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 카운터로 내려와 이양이 자살하였다고 112신고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경찰 수사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우선, 성관계를 거절한 것이 살인 동기가 됐다는 부분부터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더욱이 ▲휴지를 입에 넣은 채 인공호흡을 시도했다는 점 ▲택시를 타고 가던 중 수표를 택시 밖으로 버렸다는 점도 상식상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특히 수표는 사건 발생 후 은행으로 돌아왔고, 교환 당시 수표의 외관은 깨끗하고 조금 구겨진 정도에 불과했다. 또 수표에는 ‘수한남’이라는 제3의 이름이 배서되어 있었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검찰과 경찰은 수표 추적 조사를 아예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변사체의 직장 온도 및 사체 경직상태 등을 측정한 수사관은 현장 감식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가 아니었다. 직장 온도의 감정도 사체 발견 직후 즉시 한 것이 아니라 직장온도계를 구하지 못해 사체 발견 후 약 5시간이 지나서야 온도를 측정했다.
직장 온도는 30분이나 60분 간격으로 3회 이상, 그리고 최소한 20cm이상 넣어 측정해야 한다. 그러나 수사관은 온도계를 7cm 정도만 삽입, 단 한 번 측정했다고 한다. 더구나 사체 경직상태 등의 검시는 부검의사가 현장에서 직접 해야 하는 것임에도 경험 없는 수사관이 맡았다.
위의 소화 상태에 대해서도 당시 이양이 음주 상태에서 성행위를 하면서 육체적인 흥분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소화기능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부분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범죄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수사관의 과도한 의심이 본질을 훼손하는 결론을 낳고야 말았다. 이양을 다시 깨우기 위해 여관으로 갔다고 말한 K순경을 처음부터 의심한 경찰은 부검의사의 시신 부검 결과가 도착하자마자 그를 범인으로 확신한다.
그때부터는 증거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의 확신이 증거의 중요성을 깎아내리는 양상이 돼 버렸다. 곧바로 범행 현장에서의 K순경의 몸짓(7시에 여관방에서 전화를 금방 받았다는 것), 행동(이양의 낙태, 결혼요청을 거절) 등이 하나하나 더해져 진실과는 다른 범행 스토리가 구성됐다. 다급해진 K순경은 급기야 동료 경찰관으로서의 온정을 보이면서 살인 혐의를 폭행치사로 감경해 주겠다는 수사관들의 회유에 못 이겨 ‘슬픈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검찰이 이 ‘서글픈 거짓말’에 속지(?) 않으면서 사태가 더욱 커진다. 검찰이 폭행치사가 아닌 살인죄로 K순경을 기소한 것이다. K순경은 급히 진실을 밝히고자 몸부림쳤으나 1심과 2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상고심 직전 구치소 내에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K순경은 더 이상 미련 없이 상고심 판결을 기다리던 중 진범인 S군이 잡히고서야 어렵게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법조계 내에서는 이 사건이 적잖이 회자됐었다. 상고심 판결 후 2심 당시의 주심이었던 판사(현재 변호사)는 당시 무죄 판결을 내리려 했으나 판결 합의 중 다른 판사가 “K순경이 자신에게 불리한 자백을 거짓으로 할 리가 없지 않느냐”고 유죄를 고집해 부득이 유죄 판결을 내렸다고 고백했다. 그 판사는 유죄 판결을 내리고 법원을 나서는데 뒤에서 ‘그것도 판결이냐’고 꾸짖는 환청을 들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김아무개 검사는 사표를 제출했다가 주위의 만류로 철회했다고 한다. 그 후 김 검사는 ‘자나 깨나 자백에 기대지 말자’는 수사철학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고 한다.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진범이 검거된 뒤 내려진 판결이기 때문이다. 정황상 1, 2심 판결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당시 주심관인 박아무개 대법관은 진범이 잡히지 않았어도 그런 판결을 내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판결의 옳고 그름을 떠나 대법원이 K순경의 주장을 인간적으로 경청하고, 사망 시간 등 과학적 증거의 한계에 대해 면밀한 검토했던 점은 상당히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