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13>
▲ 전통적으로 옥장도는 계급사회를 상징하는 장신구로서 신성시되어 왔으며 조선시대의 왕족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옥으로 만든 것을 소장하는 풍습도 있었다. 도암 박용기 옹이 제작한 ‘황옥금은장 갖은을자도(사진 위)’ (전장 170mm 1978년 작)와 ‘백옥금은장 갖은팔각도 | ||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서정주의 ‘귀촉도’ 중에서
은장도는 옛날 우리 여인네들이 자신에게 닥쳐오던 각종 위협과 유혹, 시련을 꿋꿋이 물리쳐 내고 몸과 마음을 지키고자 하는 버팀목이었다. 그런가 하면 봉건사회에서 여인네들이 안아야 했던 수많은 숙명과 질곡을 서러워하며 결국은 자신을 향해 찌르던 한 맺힌 항거의 징표이기도 했다. 또 서정주의 시에서처럼 멀리 떠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나를 잊지 말라며 원한도 울음도 참으며 머리털을 잘라 신을 엮어줄 때 빼어드는 단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은장도는 옛 여인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언제나 처절하게 그 시퍼런 날을 번쩍이고 있었다.
은장도란 은으로 장식한 장도(粧刀)로 장도란 치장되어 있는 작은 칼을 뜻한다. 원래 몽골의 영향을 받아 고려 후기부터 일반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초에는 휴대용 도구처럼 실용적인 목적으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휴대했다고 한다. 야외에서 간단히 물건을 자르거나 다듬고 나물을 캘 때도 사용했고 필요하면 호신용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 대추나무금은장십장생문사각첨자도 (전장 175mm 2005년 작)와 배부른 원통형 장도(고려장도) (전장 250mm 2000년 작) | ||
이러한 은장도도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 되자 호신용보다는 멋을 부리는 노리개처럼 인식되고 사대부 여인들의 사치품으로 변하면서 모양과 장식이 화려해지고 다양해졌다. 당시 여인들이 지녀야할 세 가지 필수품을 들라면 빗과 거울 그리고 은장도였다. 여인들은 은장도에도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어 부귀영화와 수명장수를 빌고, 액을 물리치기를 바라며, 부부의 화합을 염원하기도 했다.
장도는 시대에 따라 그 길이가 변했지만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며 남성용의 경우 보통 15cm 내외, 여성용의 경우 10cm 내외로 정착됐다.
재료로는 금, 은, 백동 등의 금속재 외에도 나무, 옥, 비취 등이 쓰였는데 칼자루와 칼집의 재료에 따라 은장도 외에도 금장도(金粧刀), 목장도(木粧刀), 골장도(骨粧刀) 등의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은으로 꾸며진 은장도가 그 수수하며 단아한 모습과 은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 여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도암 박용기 옹이 장도를 제작하고 있다. 사진제공=광양 장도박물관 | ||
또 칼자루와 칼집이 맞물리는 곳에 턱이 있는 것을 몽개칼, 없는 것을 맞배기칼이라 하고 칼집이 원통형인 것을 평칼, 네모가 진 것을 사모장도, 팔각으로 모가 난 것을 팔모장도 또는 모잽이장도라 했다.
또한 형태에 따라 적절한 장식과 무늬가 아로새겨졌다. 남성용 장도는 글자, 산수(山水), 누각(樓閣), 운학(雲鶴), 박쥐 등 선비의 기상과 호운을 나타내는 것이 많고, 여성용은 꽃나무, 나뭇잎, 국화, 매화, 대나무, 난 등 여성 취향의 장식성 표현이 두드러졌다.
은장도는 차는 위치에 따라서도 이름이 다른데 주로 혼인한 여자가 노리개로 옷고름에 찬 것은 패도(佩刀), 아직 혼인하지 않은 여자가 주머니 속에 지니는 것은 낭도(囊刀)라 했다.
장도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울산 영주 남원 등지에서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전라남도 광양 지방의 장도가 역사가 깊고 섬세하며 종류 또한 다양하여 한국적 우아함과 장식용으로 뛰어난 공예미를 자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