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대박” 법원은 “혼돈”…검-법 본격 갈등노선 우려도
출근하는 김명수 대법원장. 고성준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이 결정된 것은 1월 24일 새벽 2시쯤. 7시간 뒤인 오전 9시쯤, 김명수 대법원장은 전직 대법원장이 헌정사상 처음 구속된 데 대해 “국민께 죄송하다”며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난 김 대법원장은 “참으로 참담하고 부끄럽다”며 “지금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떤 말씀을 드려야 우리의 마음과 각오를 밝히고 또 국민 여러분께 작으나마 위안을 드릴 수 있을지 (드릴 말씀을) 찾을 수 없다”고 통탄했다.
검찰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는 김 대법원장이 지난해 6월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힌 뒤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만에 하나 영장이 기각됐을 경우, 검찰 수사를 선택한 김 대법원장에 대한 책임론이 법원 내부에서 제기되는 것은 자명한 흐름이었다. 이를 의식한 듯, 김 대법원장 역시 기자들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를 두고 벌어진 법원 내부 갈등을 어떻게 봉합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법원 흐름에 밝은 법조계 관계자는 “김 대법원장이 청와대에서 지시를 받아 갑작스레 검찰 수사를 선택했다는 얘기가 대법관들로부터 나오는 등 김 대법원장의 리더십에 대해 모두가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이었다”며 “영장이 기각됐다면 김 대법원장 책임론이 불가피했고 그 상황만 기다리던 판사들도 적지 않았는데, 영장이 발부되면서 김 대법원장 입장에서는 한숨 돌린 측면도 있다”고 평가했다. 구속영장을 발부하며 법원 스스로 “양 전 대법원장이 범죄가 일부 소명된다”고 밝힌 것 역시 다른 판사들에게 ‘그 정도로 잘못한 게 있구나’라는 메시지로 전달됐다는 얘기다.
# 이례적 영장 발부
다소 이례적인 영장 발부 결정이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할 때만 하더라도 법조계에서는 “영장 발부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영장실질심사를 맡은 명재권 부장판사는 ‘구속’을 결정했다. 명 부장판사는 “범죄 사실 중 상당 부분 혐의 소명이 되고 사안이 중대하며 현재까지의 수사 진행 경과와 피의자(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지인 및 중요 관련자들과의 관계 등에 비추어서 증거 인멸 우려가 있으므로” 영장을 발부한다고 밝혔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월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서울구치소에서 대기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법원 측 고위 관계자 역시 “진술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검찰은 김앤장에서 압수한, 강제 징용과 관련해 김앤장 측이 작성했다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한상호 변호사 독대 문건’ 등을 제시했다고 들었다”며 “객관적 증거를 양 전 대법원장의 ‘구두 해명’이 이겨내지 못한 것 같다. 구속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 지배적이었던 것도 영장전담부 판사에게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영장전담 판사가 본인이 속해 있던 조직(법원)의 의혹들에 대해 스스로 관대한 판단을 내리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얘기다.
# 보기 좋게 법원 꺾은 검찰
함께 청구한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됐지만, 검찰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정점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달성했다. 검찰은 이제 구속된 양 전 대법원장을 상대로 추가로 혐의를 추궁한다는 계획이다. 설 연휴가 지난 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기소하고, 관련된 판사 20~30명을 일괄 기소하는 방식으로 수사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검찰 내에서조차 ‘대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좋다. 검찰 관계자는 “한동훈 3차장검사 등 수사팀에서 ‘법원을 무조건 잡는다’고 수사 초반 얘기할 때만 해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다들 얘기했다. ‘양승태는 불구속 기소가 목표’라는 말이 공공연했을 정도”라며 “7개월 만에 우리의 수사 결과를 판단해오던 법원의 전 수장을 구속시키지 않았냐. 검찰 위에 군림하던 법원을 상대로 검찰이 얼마나 무서운 칼을 가진 조직인지를 잘 보여준 것 같다”고 자평했다.
반면 법원은 말 그대로 혼돈이다. 연락이 닿는 판사들마다 “부끄럽다, 주변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참담하다”고 입을 모아 얘기하는 상황이다. 기자들에게 “정말 양 전 대법원장이 지시했냐”고 묻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번 수사를 계기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법원이 ‘그래도 법원이 검찰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검찰 출신의 대형 로펌 변호사는 “역대로 검찰에 대한 사법개혁 요구가 나올 때마다 법원은 현명하게 빠져나가던 조직”이라며 “법원에서 사건이 시작해도 검찰이 항상 더 큰 개혁의 대상이 되곤 했을 정도로 법원이 검찰과의 경쟁에서 밀린 적이 없는데, 이번 양 전 대법원장 구속으로 구긴 이미지를 아마 어떤 방식으로든 검찰에 다시 돌려주려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이 검찰의 이번 ‘수사’에 다른 방식으로 견제를 시작할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 검찰 고위직 관계자는 “법원이 최근 검찰이 정치적인 사건들을 기소할 때 많이 사용하는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며 무죄 판단을 하고 있지 않냐”며 “안태근 전 검찰국장도 인사권 남용으로 법정 구속(징역 2년)되는 등 법원과 검찰의 갈등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평가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