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의 스타 의식 버려야”…“선수와 코치로 한국 생활, 나는 행운아”
K리그 외국인선수 적응을 위해 나선 신의손 김해시청 코치.
[일요신문] 1992년 일화 천마(현 성남 FC) 골키퍼로 영입된 발레리 사리체프. 영입 직후부터 팀의 3연패 주역으로 활약하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후 K리그 최초로 한국 국적을 취득, ‘신의손’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선수 생활 이후로도 한국에 남아 골키퍼 코치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생활만 29년째인 신의손 김해시청 코치는 최근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주최한 K리그 아카데미 외국인선수 과정 ‘헬로 K리그’에 초대됐다. 후배 외국인선수들의 K리그 적응을 돕는 강사로 나선 것이다. 자신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준 신의손 코치를 강의 이후 만났다.
#한국 적응 도우미의 조언 “새벽훈련 힘들어도 ‘마인드’ 바꿨다”
지난 29년간 국내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외국인 선수들의 적응을 위해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코칭이 아닌 다른 방면으로 선수들을 도울 수 있어 기뻤다. 나는 그저 나만의 생각을 이야기 했는데 선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며 소감을 전했다.
현직 외국인 선수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전했다. 그는 “역시나 적응이 중요하다. 한국만의 스타일에 빠르게 적응해야한다”면서 “한국은 (대부분 선수들의 고향인)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과는 다르다. 처음에는 눈치도 필요하다. 전통, 스타일, 의사소통 등을 살펴야한다. 팀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신 코치는 한국만의 큰 특징으로 ‘하드 트레이닝’을 꼽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국어로 ‘열심히 해, 끝까지, 집중해’를 연발했다. 그는 “우리 세대 때는 더 혹독하게 했다”면서 “외국인 선수들이 한국에 왔을 때 그간 스스로 쌓아온 커리어를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선수를 0에서부터 새롭게 평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좋은 이미지를 남기려면 트레이닝부터 열심히 해야 한다. 스타 플레이어들은 각자 취향이 있어서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빨리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 또한 한국만의 훈련이 특별하게 여겨졌다. 신 코치는 “나는 사실 아시아에서 태어나 아시아에서 태어났다. 서아시아에서 태어났지만 그래도 같은 아시아권이라 문화적으로 조금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적응에 유리하긴 했다”면서도 “하지만 축구적인 면에서는 조금 달랐다. 많은 훈련이 조금 이상했다.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훈련을 공과 함께 하지만 한국은 공 없이 하는 시간이 길다”고 설명했다.
이어 새벽훈련을 이야기하면서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어로)새벽훈련 있어요. 유럽에서는 절대 해보지 않은 것. 아침 7시에(한숨)”
하지만 그가 한국 무대에서 롱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시도한 변화였다. 그는 “나를 바꿨다(Change my mind). 힘들기도 했지만 안하겠다는 말은 절대 안했다. 팀원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열심히 해, 열심히 해’”라며 웃엇다.
또한 그간의 경험이 그의 빠른 적응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신 코치가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그는 이미 33세의 베테랑 선수였다. 그는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이미 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한국의 특수함은 나에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프로무대에 첫 발을 내딛은 시점이 1978년이었다. 한국에 왔을 때가 1992년이었다. 이미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말했다.
#사리체프에서 신의손까지…화려했던 선수시절
15년에 가까운 선수생활을 경험하고 한국에 온 그였지만 그는 K리그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레전드’로 평가 받는다. 그런 신 코치에게 선수시절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다. 그는 “좋은 순간? 나쁜 순간?”이라며 되물었다. 두 가지 모두를 요구했다.
“좋았을 때는 일화에 있을 때다. 처음 일화에서 뛸 때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화 속에서 새로운 축구를 접하며 매우 흥미로웠다. K리그(3연패), 슈퍼컵, 챔피언스리그, 콘티넨탈컵 등 모두 우승했다. 한국이든 아시아든 항상 이겼다.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바로 슬픈 순간이 찾아왔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경기에 뛰지 못하게 됐다(당시 신의손의 활약에 다수의 구단이 앞 다퉈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 이후 유망주 성장을 이유로 외국인 골키퍼 영입 금지 조항 신설). 그런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기에 뛰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슬프게 했다”
그는 스스로를 ‘행운이 있는 선수’라고 칭했다. “일화에 있을 때, 좋은 선수들이 굉장히 많았다. 안익수, 신태용, 고정운, 이상윤, 박남열… 안양 LG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영표, 최용수, 김동진 등등 팀 내 반 이상이 대표팀 선수들이었다”면서 “아무리 좋은 선수라도 혼자서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그 때 내가 뛰던 팀들은 한 팀으로 움직였고 강력한 모습을 경기장에서 보여줬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참 행운아였다”며 웃었다.
그는 행운의 연속이었던 귀화 과정을 설명하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명 골키퍼이면서 K리그 최초의 귀화선수로도 유명했다. 그는 1990년대 후반 K리그에서 선수로 뛸 길이 막혔지만 코치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조광래 안양 감독의 ‘경기에 뛰겠냐’는 제안이 있었다. 신 코치는 “처음엔 당연히 농담인줄 알고 그냥 웃어 넘겼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또 말하더라. 농담이 아니었다. 바로 귀화 준비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귀화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던 그에게는 시험이라는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키프로스 전지훈련도 따라가지 않고 국내에 남아 시험을 준비했다. 너무나도 어려웠다. 부천 SK 니폼니시 감독의 통역 일을 하던 한국인 친구가 도와줬지만 그래도 어려웠다.”
시험 통과를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도 행운이 따랐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내 귀화 추진 소식이 많이 화제가 됐다. 2달 동안 방송국 카메라가 따라 붙으면서 촬영을 했다. 시험장에도 따라왔다”면서 “필기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문제가 너무 어려웠다. 문제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10분도 안 돼 다풀고 나가는 사람도 있더라. 끙끙거리고 있는데 당시 감독관이 몇개 힌트를 주기도 했다. 다행이 필기 시험에 겨우 통과했다”고 설명했다.
필기시험을 통과한 그에게 면접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면접은 오히려 더 수월하게 지나갔다. 그는 “면접에 들어갈 때 당시 나를 취재하던 카메라 두 대가 함께 들어왔다. 면접관이 카메라 등장에 너무 긴장을 해서 그런지 면접이 굉장히 간단하게 넘어갔다. 며칠 뒤 기자들이 나에게 ‘패스 했다’며 소식을 전해주더라”며 웃었다.
# 은퇴 후에도 계속되는 한국생활
신의손 이후에도 한국 여권을 선택하는 선수들이 있었다. ‘푸른 눈의 한국인’이라 불리던 그들은 이제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일부만이 한국을 오가며 일을 하고 있을 뿐 다수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한국생활을 지속하는 이유를 물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행운아다. 좋은 팀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코치로서도 계속 이어서 일을 하고 있다. 코치 일을 하고 있기에 한국에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이다. 한국을 떠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고국으로 돌아갈 이유도 없다”
30여년 남짓의 한국 생활 중 절반 이상을 코치로 활동해 온 그다. 연령별 대표, 1부리그와 2부리그, 여자축구팀, 실업팀까지 거치지 않은 무대가 없다. 쉼 없이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비결을 묻자 그는 “아니다”라며 반색했다. “대교(여자축구팀)에 있다가 팀이 해체됐다. 그래서 1년을 쉬었다. 직업이 없었다. (한국어로)힘들어요”라며 웃었다. 현재 그는 윤성효 감독, 박남열 수석코치와 함께 김해시청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오랜 한국 생활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없을까. 그는 문제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에는 아내, 자녀들과 함께 한국에서 생활했다. 한국에서 자녀들을 길렀고 이제는 그들도 다른 나라에서 산다. 1년에 한두 번 만난다. 자녀들이 한국으로 오기도 하고 다른 나라에서 다 같이 모이기도 한다. 우리 엄마와 형제들을 만나러 내가 러시아로 갈때도 있다. 나는 그정도면 충분하다. 지금 이렇게 한국에서 일하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아직 힘(power)이 있다. 90세까지 골키퍼 코치로 선수들과 함께 뛰고 싶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