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애 곧 나오는데, 2년 기다리라 하나”…정치권 ‘종교계 눈치’ 총선 전 개정안 마련 미지수
낙태죄가 처음 헌법재판소에 오른 것은 2012년이다. 조산원을 운영하는 조산사 송 아무개 씨는 2010년 임신 6주된 태아를 낙태시켜 달라는 촉탁을 받고 낙태 시술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형법 269조에 따르면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 시술을 한 의사와 조산사 역시 형법270조 제1항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다.
당시 헌재는 낙태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낙태죄를 도운 의사를 처벌하는 것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낙태를 처벌하지 않거나 형벌보다 가벼운 제재를 가하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낙태가 만연하게 돼 자기낙태죄 조항의 입법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사회적 경제적 사유로 인한 낙태를 허용하게 된다면 낙태가 공공연하게 이뤄져 생명경시풍조가 확산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여론도 이를 수긍하는 듯했다.
시민단체가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 찬성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고성준 기자
낙태죄 존폐여부가 다시 수면 위로 오른 것은 2017년이다. 낙태 시술을 도운 혐의로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 정 아무개 씨가 “낙태죄는 헌법상 행복추구권과 평등권 등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정 씨는 1심 재판 중 법원에 위헌법률 심판 제청을 신청했다 기각되자 그 해 2월 직접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2019년 4월 11일. 헌재는 2년 2개월의 고민 끝에 낙태죄 처벌 조항은 사실상 위헌이라는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위헌 취지의 의견을 낸 재판관만 7명이었다. 그 사이 낙태를 바라보는 사회 시선도 바뀌었다. 여론 조사 결과 10명 중 6명이 낙태죄 폐지에 찬성했다.
헌재는 판결문을 통해 “낙태죄 조항이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입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낙태 허용 기간을 임신 22주로 제시했다. 사실상 가이드라인을 준 셈이다. 다만 당장의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 2020년 관련법 개정 전까지는 현행법이 적용된다고 밝혔다. 문제는 남은 1년 8개월이다. 2020년까지는 현행법이 적용된다고 하지만 의료계를 비롯한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 당장 들어올 낙태 문의에 현장 “어떻게 하나”
낙태죄 폐지로 가장 많은 영향을 받게 된 의료 현장은 혼란스럽다는 반응이다. 당장 11일 이후 들어오는 문의전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서울 여의도 소재의 산부인과 관계자는 “이전까지는 낙태 관련 전화가 오면 거절하거나 방문을 권했다. 그런데 12일부터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년까지는 불법이라지만 당장 내일 수술이 필요한 환자도 있다. 또 상담 과정에서 마음을 바꾸는 환자도 종종 있어 병원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돕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여성 상담센터도 비슷한 상황이다. 상담사 A 씨는 “법 공백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출산 환경이 안 되어 당장 임신중지를 원하는 10대 청소년이나 예비 미혼모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애는 10개월 뒤면 나오는데 ‘2년만 기다렸다 수술하라’고 할 수도 없고…”라고 말을 아꼈다.
# 의료계 “건강보험 적용과 수술법 교육 필요”
의료계는 낙태수술이 사회적으로 보장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진행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임신중절을 결심하게 되는 주 원인 가운데 하나가 경제적 어려움인 탓이다. 최안나 산부인과 전문의는 “낙태를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했다. 수술 후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 하는 경우도 상당수다. 이제 정부 차원에서 건강보험 등 최소한의 사회적 인프라를 마련해줘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현재 모자보건법상 허용된 합법적 낙태에 대해서는 건강보험이 적용되고 있다. 임신 16주 미만의 임신중절수술 비용은 16만 4437원이다. 최소 30만 원에서 70만 원까지 부르는 게 값이었던 불법 임신중절수술과는 큰 차이가 있는 셈이다.
산부인과 전문의를 대상으로 올바른 수술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간 ‘불법’이라는 이유로 국내 의과대학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않은 탓이다.
현재 대부분의 산부인과에서 시행하고 있는 낙태법은 소파술이다. ‘큐렛’이라는 날카로운 도구로 자궁 내막을 긁어내는 방법이다. 한 번의 수술로도 자궁에 큰 자극을 줄 수 있어 WHO(세계보건기구)에서도 소파술보다는 흡입술을 권장하고 있다. 산부인과 전문의 B 씨는 “우리 세대 의사들은 낙태 수술법을 현장에서 알음알음 배웠다. 예비 의료인만이라도 대학에서 올바른 수술법을 배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일부 의료인사는 ‘낙태진료를 거부할 권리’를 주장했다. 앞서 최 전문의는 “모든 의사가 동일할 수는 없다. 생명을 다루는 만큼 경제적 이유가 아니라 의사 개인의 신념에 따라 낙태하도록 법적 개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종교계 의료인을 위한 조치로 이해된다. 실제로 가톨릭계 병원인 성모병원에서는 4월 헌재 결정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낙태죄 폐지 반대서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산부인과의사회에서도 산부인과 전문의의 ‘낙태진료 거부권’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 모든 공은 국회로
남은 것은 국회의 몫이다. 국회는 남은 기간 안에 낙태 허용 시기와 기준, 낙태 상담 시 숙려기간 등 일정 조건을 만족하는 개정안을 마련해야 한다. 입법 기한은 2020년 12월 31일이다. 내년 말까지 대체 입법이 없으면 형법상 낙태죄 조항은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입법 과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낙태 허용 시기다. 헌재는 22주라는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지만 ‘허용 범위가 지나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체로 임신 12~16주를 초기, 28주까지를 중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외 낙태 허용국가인 프랑스와 독일 등의 경우 낙태 가능 기간을 12~16주로 삼고 있다.
반면 여성시민사회단체 모임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기자 간담회를 열고 “향후 임신중지 기간 제한 없이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낙태 허용 기간을 정하는 과정에서 종교계, 여성계, 의료계 등의 입김이 국회에 크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법안 개정에 강한 의지를 보이는 곳은 정의당뿐이다. 정의당은 11일 논평을 통해 “형법상 낙태죄를 폐지하고 모자보건법상 인공임신중절 허용한계를 넓힌 개정안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정의당을 제외한 다른 당들은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총선을 1년 앞두고 정치권이 종교계 눈치를 보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가톨릭과 개신교 등 ‘표밭’인 종교계의 표심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20대 국회에서 개정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21대 국회가 개정안을 마련할 수 있는 기간은 8개월 남짓에 불과하다.
정치권이 이익단체의 눈치를 보느라 개정안을 내지 못한 사례는 넘친다. 지난 2017년 윤상직 자유한국당 의원이 공개한 ‘부처별 미개정 위헌법령 현황’에 따르면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고도 개정되지 않은 법률이 무려 62건에 달했다.
자유한국당은 11일 논평을 통해 “새로운 입법과제가 생겼다”면서도 “각계 의견을 경청하고 심사숙고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식 대변인 역시 “헌재의 결정을 존중한다. 조만간 후속조치를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민주당 관계자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결정된 것은 없다. 당 내부에서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12일 ‘총선 전에 개정안이 통과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는 질문에 “최선을 다하겠다. 일단 우리는 다음주에 개정안을 발표한다. 민주당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고 답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