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과의 25년 우정이 뚝뚝 묻어나
당시 주지사들이 쓴 편지.
저도 이 편지를 오랫동안 쓰며 많은 분들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동남아여행 중에 만난 분들도 이 편지를 많이 읽었다고들 합니다. 부족한 글인데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교사들이 실습으로 쓰는 글은 편지문인데, 기승전결 순서로 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은 아빠에게, 한 사람은 여친에게 등 자유롭게 정해 쓰기 시작합니다.
편지를 쓰는 시간에 문득 우리 마을의 옛 영국 총독부 관저에 붙어 있는 100년이 훨씬 넘은 편지가 떠오릅니다. 거버너 하우스로 부르는 영국총독 관저이고 100년이 넘은 건축물입니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고 있는데, 그 안에 6통의 색 바랜 편지가 붙어 있습니다. 미얀마 메이묘(Maymyo) 스탬프가 선명하고 그 오랜 옛날에도 영국인들은 편지지 양식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는 게 이채롭습니다. 이 도시는 아직도 메이묘로 부릅니다. 영국장교 메이 대령(Colonel May)이 다스리던 마을이라는 뜻이지요. 1885년 미얀마를 통치하던 만달레이 왕궁이 영국군에 함락되고, 그해 11월에 메이묘로 왔다고 편지는 쓰고 있습니다.
메이묘 영국총독 관저.
미얀마를 통치하던 영국 총독 관저에 남은 편지들은 대개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쓴 편지입니다. 영국인 거버너, 즉 주지사들이 쓴 것들입니다. 당시 미얀마는 인도령의 한 주로 편입되어 사람들은 인도 사령본부로 보낸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미얀마어로도 편지 옆에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사들과 두 가지 언어를 번역을 해보니, 뜻밖에도 아주 사적인 내용들입니다.
당시 제이 메이 대령은 공식적으론 1887년 벵갈 경비사령관으로 미얀마에 왔습니다. 양곤이 그때부터 수도였지만, 너무 더워 여름철에는 행정수도를 메이묘로 옮겨서 일했습니다. 그후 미얀마 군부시절인 1989년 탄쉐 정권이 삔우린으로 도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지금은 해발고도 1070미터, 가장 가보고 싶은 휴양지로 꼽힙니다. 당시 식민시절의 인도인들과 네팔사람들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역대 주지사들의 밀랍인형.
편지의 내용들은 1885년에서 1910년까지 25년간을 회상하고 감사하는 글들입니다. 1886년 영국장교들은 메이묘로 와서 먹고 잘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사원이었고, 거기서 우 투다사나(U Thudasana) 큰스님을 친견하게 됩니다. 그분이 얼마나 잘 돌봐주었는지, 신앙이 다른 두 사람 간에 긴 우정이 지속됩니다. 서로 사원과 관저를 오갔고, 대화를 나눴고, 영국 주지사는 떠나면서도 감사의 편지를 쓰게 됩니다. 메이묘에는 1928년 이전에는 부총독이, 이후부터는 미얀마의 통치자가 살았습니다. 총독의 비서가 두 사람 간의 약속을 잡는 편지도 있습니다. 편지 내용을 보면 주지사들은 한결같이 그 스님의 따뜻한 성품과 인격을 존경하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주지사들과 스님 간 25년간 이어진 우정. 아주 개인적인 편지들이었습니다.
이제 교사들이 실습으로 쓴 각자 편지를 소리내어 읽습니다. 아빠에게, 사랑하는 친구에게…. 긴 문장은 읽어보면 짧고 간결하게 고쳐집니다. 글의 기승전결이 아직 잘 잡혀 있지 않지만 그런대로 뼈대는 잡았습니다. 우린 글을 고쳐서 실제로 편지를 보내기로 합니다. 편지도 그렇듯이 인생에도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이젠 사라진 영국총독들이 쓴 편지를 읽으며,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남은 마을의 이름이 ‘메이묘’인 까닭을 어렴풋이 느끼게 합니다.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