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컵, FA컵 등 국내 가능한 모든 우승 경험...“능력에 비해 많은 사랑 받아…선수들도 ‘팬 스킨십’ 늘려야”
현역에서 물러나 아마추어 선수들과 함께 축구를 즐기고 있는 김형일. 최준필 기자
[일요신문] 특유의 투지 넘치는 수비로 고대 로마의 검투사를 연상케해 ‘글래디에이터’라는 별명이 붙은 수비수 김형일. 2007년 경희대를 졸업하고 12년간 프로무대에서 활약한 그가 최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대전 시티즌에서 데뷔, 포항 스틸러스, 전북 현대, 부천 FC 등을 거쳐 중국과 태국 등 해외무대까지 경험한 그는 최근 팬들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서며 그동안 받은 사랑을 보답하려 하고 있다. 이제는 선수가 아닌 ‘헤드 코치’로 불리고 있는 김형일을 ‘일요신문’이 만나봤다.
#‘선수 김형일’이 아닌 ‘헤드코치 김형일’의 생활
선수시절 마치 검투사와 같은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던 김형일은 날씬해진 듯한 몸매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도 신체 변화를 인정했다. “이제는 선수가 아니라 웨이트 트레이닝을 전처럼 강하게 하지 않는다. 왼쪽 어깨 탈구 부상 영향도 있다”면서 “다만 몸이 불어나는 것은 원하지 않아서 최소한의 관리는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은퇴한 김형일의 현재 일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는 “많이들 예상하시겠지만 생활 패턴이 많이 달라졌다. 금전적으로 수입이 줄어든 것은 아쉽지만(웃음) 프로 무대에서 승부의 압박이 없다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서 늦게까지 소주를 마시기도 하고. 가장 다른 것은 취침·기상 시간이다”라고 전했다.
김형일은 최근 인기 유튜브 채널 ‘고알레(GoAle)’의 콘텐츠에서 얼굴을 비치고 있다. ‘헤드 코치’라는 직함을 달고 축구를 좋아하는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그만의 축구 비결을 전수하고 있다. 그는 “고알레컴퍼니 이호 대표와는 학교 선후배 사이다. 축구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모습에 흥미가 생겨 대화를 해보니 순수 아마추어 선수들을 위한 회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취지도 좋고 재미도 있어서 함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때마침 은퇴를 결심하고 조기축구회에 나가서 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아마추어 무대는 그가 막연히 혼자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프로생활을 쭉 해왔기에 몰랐던 부분이 있었다. ‘조기축구’라고 하면 그저 땀 흘리고 운동을 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줄로만 알았다. 처음 나갔을 땐 그래서 좀 설렁설렁했다. 뺏기지는 않으니까 공 갖고 있다가 옆으로 툭툭 내주고 찬스가 나도 옆으로 내주고 그랬다. 계속 함께하며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더라. 아마추어들도 승부욕이 강하고 축구를 더 잘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고알레컴퍼니만의 헤드코치가 아니었다. 태어나고 자란 인천에서 ‘브라더스포츠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현재 축구, 야구를 할 수 있는 실내·실외 구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동생도 축구선수를 했었고, 야구를 했던 친척도 있다. 함께 힘을 합쳐 운영하고 있다. ‘김형일 축구교실’도 계획하고 있다”며 눈을 반짝였다.
그간 엘리트 무대에서 축구선수로 살아왔지만 아마추어 무대로 뛰어들게 됐다. “‘너 정도면 프로팀이나 고교, 대학팀 등 엘리트팀 코칭스태프로 갈 수 있는데 왜 안가냐’고 하시는 분들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타이트한 생활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싶었다. 물론 그쪽으로 흘러가서 선택을 했다면 또 즐겁게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전엔 운동 시간을 빼면 몸 관리를 위해 쉬는 시간이 많았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다니느라 더 바쁘고 피곤한 것 같다”며 웃기도 했다.
김형일은 스스로를 “가진 것에 비해 많은 사랑을 받은 선수”라고 표현했다. 최준필 기자
지난 선수생활을 함께 돌아봤다. 대전, 포항, 전북, 부천 등을 거치며 수많은 일들을 겪었다. K리그 1, 2부리그에서 모두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두 번이나 정상에 올랐다. 리그컵, FA컵 등 국내에서 가능한 모든 우승을 경험했다. 그는 스스로를 ‘복 받은 선수’라고 표현했다.
“제 능력에 비해 많이 사랑을 받았고 좋은 커리어도 남겼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 글을 쓰며 우승 횟수를 나열하는데 많기는 하더라(웃음). 그래서 은퇴 결심도 편하게 하지 않았을까. 다만 순간순간마다 ‘조금만 더 잘했으면,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좋았을 걸’하는 아쉬움은 있다. 아쉽게 우승을 놓쳐 2위를 했던 시즌들이 있는데 그때 더 잘했으면 하는 후회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커리어를 가졌음에도 재차 스스로를 낮췄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학교만 좋은 곳(부평고-경희대)을 나왔지 청소년대표, 대학선발 등에 단 한 번도 뽑힌 적이 없다. 초중고 때는 꿈도 안 꿨고 대학 때 대학선발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걸국 못했다”며 웃었다. 이어 “신인 때(대전 시절)도 어렵게 시작했다. 동계 전지훈련을 터키로 갔는데 ‘3군’으로 분류돼 오전에 1군이, 오후엔 2군이 하는 연습게임에 뛰지도 못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그는 당시 신통치 않은 성적을 거두던 대전이 기회를 부여해 연말 신인왕 경쟁을 하는 수준까지 성장하게 됐다.
리그에서 주목받는 선수가 됐고 국가대표팀에도 오가게 됐다. 하지만 그의 A 매치 출장 기록은 ‘2경기’에 불과하다. 국가대표로 더 많이 뛰고 싶은 욕심은 없었을까. 그의 대답은 ‘NO(아니오)’였다. 그는 “경기를 많이 뛰는 선수였으면 아쉬웠을 수도 있다. 나는 소집기간이 끝날 때마다 ‘다음에 또 뽑힐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선수였다(웃음). 불러 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한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2010년에는 23인 엔트리의 일원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 현장에 함께 했다는 것이 무한한 영광이다. 중국, 태국에서 생활할 때는 월드컵에 다녀왔다는 것만으로도 동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친구들이 내가 나이가 많아서 대우해준 것 일 수도 있지만”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경기장 위에서 상대 공격수와 강하게 부딪혔던 그에겐 ‘글래디에이터’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운동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오기로 플레이했다. 경기장에선 그런 일종의 ‘갑옷’을 입고 있었던 느낌이다”라며 “경기가 끝나면 갑옷은 벗어서 내려 놓는다”고 했다.
그는 경기장에서 수비 장면마다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글래디에이터’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그런 걸 아드레날린이라고 하지 않나. 경기장에 들어서면 흥분도 되고 집중도 잘된다. 아파도 아픈 줄도 모르고 어떻게 내가 그런 판단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경기 끝나고 돌아오면서는 맞은 얼굴이 너무 아팠다. 밤에 그 쪽으로 돌아눕지도 못할 정도였다.”
밖에선 부드러운 성격의 그가 경기장에만 서면 달라질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지금은 태권도 관장님인 친척 형님 덕분”이라고 귀띔했다. “어릴 땐 굉장히 소극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어머니 치마폭에서 나오질 않았다고 하더라. 지금 내 아들도 그렇다”면서 “친척 중에 태권도를 하는 형님이 계신데 그 분이 여기저기 ‘거친 곳’에 데리고 다녀 소위 ‘깡다구’라는 것이 생겼다(웃음). 지금도 자주 만나는데 고맙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고 설명했다.
#경기장 밖에서 넓어진 시야
김형일은 선수가 아닌 자유인 생활을 6개월 가량 하면서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오고 있음을 밝혔다. 그는 “흔히들 프로 스포츠에서 선수들이 ‘상품’이라고 하지 않나. 좀 더 포장을 하고 팬들에게 더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이어 “나도 과거엔 ‘축구만 잘하면 된다. 거울 한 번 볼 시간에 좀 더 자고 공 한 번 더 찬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지금은 멋지고 잘생긴 우리 후배들이 좀 더 자신을 가꾸기도 했으면 좋겠다. AFC 챔피언스리그 보면 중국, 일본 친구들은 나름 멋지게 하고 나온다. 우리도 그런 문화가 정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선수 시절엔 거리를 뒀던 소셜미디어 활동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전에는 그런 것 안했다. 학생 때 싸이월드나 했지. 하지만 팬 한 분이라도 더 관심을 가져주시고 경기장으로 모셔올 수 있다면 선수들이 그런 것도 열심히 하면 좋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전했다. 그러면서 “나도 지금은 인스타그램 열심히 한다. 원래 팔로워가 더 많았었는데 해킹을 당해서 계정 다시 만들었다. 팬분들과 열심히 소통하고 있다”며 웃었다.
소셜미디어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활동에 대한 뜻도 밝혔다. “박문성 해설위원이 하시는 인터넷 방송에도 출연했는데 더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경기 해설에도 도전해 보고 싶고. 물론 좀 더 배우고 준비를 해서 시작해야 한다”면서 “얼마 전에는 한국프로축구연맹 직원 분들과 봉사활동을 했는데 홍보나 흥행 관련해서 고민이 많으시더라.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다. 일단 그동안 뛰었던 구단을 돌며 인사를 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이제 소속팀이 없는 프리랜서다. 어디든 불러주신다면 달려가겠다”며 웃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글래디에이터’ 김형일이 꼽는 “나의 동료 베스트 일레븐” 김형일은 ‘함께했던 동료들 중 베스트 일레븐을 꼽아달라’는 요청에 “잘하는 선수들이 워낙 많다”며 고민을 거듭했다. 최준필 기자 ‘글래디에이터’로 불리던 수비수 김형일은 지난 12년간의 프로 생활 대부분을 K리그에서 보냈다. 그는 대전, 포항, 상주, 전북, 부천 등 다양한 팀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리그, AFC 챔피언스리그, 리그컵, FA컵 등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했다. K리그에서 남부럽지 않은 커리어를 가진 김형일에게 ‘그간 함께했던 팀 동료 중 베스트 일레븐을 꼽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런 것은 처음 해본다”고 흥미로워하면서도 “함께 했던 선수들 중에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고민된다”고 말했다. 김형일이 꼽은 선수시절 동료 베스트 일레븐 오른쪽 수비에는 최효진(전남), 중앙수비로는 조성환(FA)과 황재원 대전 코치의 이름을 올렸다. 모두 김형일과 함께 포항에서 수비진을 구축했던 인물들이다. 그는 “지금의 내가 있게 만들어준 형들이다. (김)광석이 형도 있는데 성환이형, 재원이형이 더 형들이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왼쪽 수비수로는 오른쪽이 더 자연스러운 최철순(전북)을 떠올렸다. 그는 최철순에 대해 “이 친구는 어디에 놔도 된다. 왼쪽, 오른쪽, 미드필드에 놔도 된다. 함께하면 중앙수비수 입장에서 너무 든든한 친구다”라며 칭찬했다. 또한 “철순이가 충분이 능력 있는 선순데 대표팀에 가서 좀 더 많은 기회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고 덧붙였다. 미드필드에는 신형민(전북), 김재성 해설위원, 이재성(홀슈타인 킬), 이근호(울산)까지 4명을 구상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는 다른 사람보다 신형민 한 명이면 된다. 2명 필요 없다”며 강한 믿음을 보였다. 이근호는 처음 공격수로 이름을 올렸다가 이동국(전북), 김신욱(전북)을 투톱으로 놓으며 내렸다. 그는 “동국이형과 신욱이가 많이 뛰는 편은 아니니까(웃음) 근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짠 4-4-2 포메이션을 보며 “다들 잘하는 선수다. 내가 짜는데도 내 이름은 못 들어간다. 몇 년 전이라면 아마 K리그 우승도 할 것 같다.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 축구가 45분이면 몰라도”라며 웃었다. 외국인 선수를 넣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외국인 친구들도 포함하면 온통 그 친구들 뿐이다. 모따, 데닐손, 레오나르도 등 다 넣어야 한다”는 평가로 그들의 실력을 인정했다. 김상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