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배가본드’, 넷플릭스 요구로 방영 연기…국내 엔터사들 자본력 앞세운 넷플릭스에 종속 우려
넷플릭스. 넷플릭스 공식 페이스북
‘배가본드’는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가 SBS와 함께 제작비를 들여 만든 24부작 드라마다. 총 제작비는 250억 원. 그런데 이 중 100억 원 이상을 넷플릭스가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전제작 형식으로 만들어져 지난 5월 촬영이 종료돼 SBS와 넷플릭스를 통해 5월 방영될 예정이었지만 넷플릭스가 자사 OTT 플랫폼 편성 편의를 위해 방영 스케줄을 9월로 미루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약속했던 제작 투자금도 9월 방영 시기에 맞춰 지급하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 제작 지연이나 방송국 사정이 아닌 외부 글로벌 OTT 플랫폼의 요청으로 지상파의 방영 일정이 연기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변화하는 미디어 분위기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평가한다.
스튜디오드래곤이 제작한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의 경우 시즌1이 끝나고 시즌2에 돌입한다. ‘아스달 연대기’는 방영 전부터 여러 의미에서 화제를 모았다. 김원석 연출에 김영현·박상연 극본, 장동건과 송중기 등 스타 캐스팅이 돋보였다. 특히 제작비는 540억 원으로, 국내 드라마 사상 최고액을 기록했다. 스튜디오드래곤이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은 넷플릭스가 ‘아스달 연대기’ 글로벌 선 판권을 사들이면서 제작비 중 일부를 투자한 덕분이다.
이처럼 최근 한국 드라마에 넷플릭스의 자금이 직·간접적으로 투입되는 일이 늘고 있다. KBS2 ‘태양의 후예’와 tvN ‘미스터 션샤인’, jtbc ‘스카이캐슬’ 등이 방송과 함께 넷플릭스를 통해서도 공급돼 인기를 끌었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만 해도 ‘아스달 연대기’ 외에 tvN ‘어비스’, jtbc ‘보좌관’, MBC ‘봄밤’ 등이 있다.
넷플릭스의 투자로 제작비가 늘어나면 긍정적 효과를 볼 수 있다. 미디어업계 한 관계자는 “제작비가 늘어나는 규모의 경제로 국내 시청자들에게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다“며 ”한국 드라마가 그동안 시도해보지 못한 장르나 장면을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는 만큼 한국의 엔터테인먼트사들이 은연 중 눈치를 보게 되고, 심한 경우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물론 넷플릭스는 투자를 할지언정 작품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의 각본을 쓴 김은희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넷플릭스는 창작자 의견을 존중한다고 했으며 대본에 큰 간섭이 없어 당황할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넷플릭스는 글로벌 시장 진출 초기 현지 콘텐츠 투자를 마케팅의 일환으로 활용했다. 2017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 제작비를 전액 투자하면서 한국 시장에서 플랫폼 인지도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국제전기통신연합 자료 등에 따르면 넷플릭스의 지난해 글로벌 매출은 157억 9431만 달러(약 17조 7000억 원), 영업이익은 16억 522만 달러(약 1조 8500억 원)를 기록했다. 반면 ‘아스달 연대기’의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의 지난해 매출은 3796억 원, 영업이익은 399억 원이다. 스튜디오드래곤은 코스닥 시가총액 8위 기업이다. CJ ENM에 이어 방송엔터테인먼트사 중에는 코스닥 2위에 올라 있는 ‘콘텐츠 공룡주’로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넷플릭스와 비교 불가능한 규모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에서 최근 스릴러 등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특정 장르가 지나치게 많아지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며 “한국의 드라마 제작사들도 넷플릭스의 투자를 끌어오기 위해 특정 장르 중심으로 기획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면 오히려 다양성이 줄어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다보니 한국 시청자 중심의 기획이 나오는 경우도 생긴다.
‘아스달 연대기’도 방송 이후 작품 완성도가 기대보다 미흡하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의 상고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장르의 세계관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시청자는 인기 미국드라마 ‘왕좌의 게임’과 흡사한 설정과 비주얼을 문제 삼기도 한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시장을 겨냥하다보니 무리수를 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아스달 연대기’의 송중기. tvN드라마 공식 페이스북
넷플릭스의 직·간접적 투자가 엔터테인먼트사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CJ ENM 관계자는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가 한국에 진출하면서 미디어 시장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과 달리 글로벌 판권 매각은 투자와 다른 개념이다. 넷플릭스가 투자를 통해 한국 제작사나 방송사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넷플릭스와 관계없이 글로벌 시대에 맞춰 한국 드라마 트렌드가 변화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MBC ‘이몽’이나 SBS ‘녹두꽃’ 등은 넷플릭스가 투자하지 않았지만, 100억 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됐다”며 “국내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만큼 한국 드라마도 좋은 품질로 만들어야 살아남는다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한국 드라마 제작비가 전체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