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 값싼 노동력에 살인적 일과…4차산업위원장 중국과 비교한 ‘노동 경쟁력’ 발언 씁쓸
“나는 20대 때 2년 동안 주100시간씩 일했다” “중국은 200~300명이 야전침대 놓고 주 2교대, 24시간 개발해 모바일 게임을 만들어낸다. 한국에서 이렇게 하면 불법이다.” 이 같은 소리를 답이라고 늘어놓는 이유는 결국 정책적으로 중국만큼 사람을 싼값으로 고용하지 않으면 업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견해를 일관되게 견지한다고밖에 볼 수 없으리라. 발언 하나하나가 유감스럽지만, 듣고 있자니 ‘주 100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주말도 없이 작업에 쏟아붓고도 게으르단 소리를 듣기 일쑤인 사람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만화 창작자들이다.
#값싼 노동력 확보로 성장해 온 웹툰의 현재
과거 출판 만화는 오랜 시간 기술적 문제를 넘어 제작비 문제로 단색 인쇄가 주를 이루었고, 이 단색 지면을 압도할 수 있는 그림 솜씨가 요구됐다. 펜 선과 음영만으로 모든 묘사를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데 모니터를 지면으로 삼는 웹툰으로 넘어오면서 굳이 책을 찍어야 할 이유도,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단색을 채택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웹툰은 그래서 웹툰이란 이름이 정착하기 전부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총천연색을 채택했고, 잡지라는 중간 과정 없이 자기 독자를 직접 만들고 만나면서 많은 독자들에게 빠르게 무료로 공유될 수 있는 형태를 갖췄다.
만화는 이야기의 흐름을 그림과 프레이밍을 통해 영상적으로 결합해 2차원 지면에 구현하는 대중 예술이다. 인간인 이상 작가 개인 단위가 정해진 시간 안에 만들어낼 수 있는 만화 원고의 양과 밀도에는 한계가 있고, 상업 만화는 필연적으로 이 한계를 넘어서는 분량을 요구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만화계에는 스승과 제자 관계인 도제 체제와 고용된 어시스턴트가 쓰여 왔다. 출판만화는 주 또는 격주 단위 잡지 발행 주기 내에 혼자서 수십 페이지씩 맞춰 내는 건 거의 불가능했기에, 당시 상업 지면 연재를 진행하는 만화 창작자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사람을 써야 했고 그럴 수 없으면 활동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출판만화의 시대가 여러 복합적 악재로 말미암아 저물고 웹툰이 상업 만화 시장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웹툰 등장 초기에는 강점이었던 개인 단위 창작자의 무료 공개 등이 곧바로 악재로 돌변한다. 캐릭터 상품화가 아니라 만화 그 자체가 미끼로나마 ‘상품’이 되기 위해선 결국 업체가 연재 매체를 운영하는 형태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연재란을 채운 것은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신인이었고, 상업 웹툰은 시작부터 출판만화와의 차별점을 인해전술과 물량공세로 잡았다. 웹툰 연재처 담당자는 “종이 잡지가 한 종당 10작품 남짓한 작품을 실었지만 우리는 일주일에 수백 작품을 싣습니다”라는 말을 곧잘 내어놓곤 했다.
물론 이 압도적 물량이 긍정적인 면도 많이 만들어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가능케 한 원동력은 웹툰으로 활동을 시작한 만화 창작자들 대부분이 냉정히 말해 ‘값싼 인력’이었다는 데에 있었다.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 상황은 다소 나아지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지금도 감당하기 힘든 분량을 거의 혼자 작업하고 있으며, 채색이 마치 기본인 양 정착한 웹툰 환경 속에서 채색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외주를 주며 수익의 일정 부분을 덜어내야 한다. 어시스턴트를 한둘 더 쓰는 건 사정이 나은 편이다.
웹툰이 상업 지면으로 정착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웹툰 업계에 공정 계약과 계약금 현실화 문제가 제기돼 왔다. 이에 부응해 업체들도 많은 부분을 개선해 왔으며, 유료화와 광고 도입 등으로 부가 수익 또한 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느는 게 수익만은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그동안 독자도 나이를 먹으며 웹툰에 요구하는 기대치를 더더욱 늘리고 있으며, 만화 창작자들도 이에 맞추기 위해 분량을 늘리고 사람을 쓰지 않는 선에서 화면을 효과적으로 채워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서기에 이른다. 본래 3D 모델링으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는 데 쓰이는 스케치업이 한국에서는 만화 배경 프로그램으로 각광을 받는 까닭도 결국은 개인 단위가 쓸 수 있는 돈과 시간이라는 문제에 닿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양과 밀도를 효율적으로 늘리는 노력과 독자들이 감상에 들이는 난도가 매우 반비례한다는 점이 지독한 아이러니다. 지난 칼럼에서 웹툰 악플 이야기를 했지만 악플 가운데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게 바로 놀랍게도 “게으르다”다. 웹툰 독자들은 양을 한계까지 늘려 꾹꾹 채워넣어도 짧다고 느낀다. 이쯤 되면 상업 만화로서의 웹툰이 어떻게 해야 존립할 수 있는가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충분히 줄 수 없다면, 차라리 너그럽기라도
창작자들이 주간 웹툰 연재에 회당 60~70칸을 그려내도 독자들은 짧다며 ‘분노’를 터트린다. 이 분노가 정당하길 바란다면 답은 간단하다. 만화 창작자들의 노동 환경을 지금보다 훨씬 더 개선하면 된다. 사람을 여럿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계약료가 최저한선으로 보장이 된다면 그때에서야 게으르단 비난이 일말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터다. 하지만 그나마 많이 나아졌다 해도 현재 웹툰은 여전히 ‘값싼 인력 다수 보유, 예비 창작자 많음, 1차 구독 무료’를 매력으로 삼고 있으며, 심지어 독자들까지 이를 매우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다. 젊은 독자층에게야 월 몇 백 단위 계약금이 액면가만으론 커 보일지 몰라도, 투자 시간과 부대 비용을 생각하면 크다고 해선 안 되는 비용이다.
심지어는 한국보다 더 저렴한 인건비로 같은 분량을 여럿이서 훨씬 더 고밀도 고품질로 만들어내는 중국을 비교 사례로 놓으며 노력이 부족하다는 목소리를 내는 독자와 업계인들도 있고 보면 저 4차산업혁명위원장의 발언이 정말로 남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발언 반대편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손목과 허리와 목뼈를 갈아넣다가 몸이 망가지는 만화 창작자들이 있다. 당장 계약료를 일괄적으로 두세 배 올릴 수 없으면, 하다못해 비용 상승 요인이 되는 분량과 채색 여부 등에 차라리 ‘너그럽기라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화칼럼니스트 iam@seochanhw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