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酒雲數片 捲簾花萬重(술을 마주하니 구름 조각 떠가고 발을 걷으니 꽃은 가득 피어있네): 60×30cm 한지에 혼합재료 2019
전통의 폄하. 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전통예술의 많은 부분을 버렸다. 그중에서도 서예를 버린 것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요즘 서예는 예술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서예는 우리 전통미술의 중심에 있었다. 조선 말에는 서예의 필법을 응용한 새로운 감각의 산수화가 유행했고, 추사 김정희(1786-1856) 같은 서예가는 독자적인 서체를 개발해 서예 종주국인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서예의 예술성은 서양미술에서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1950년대 나타난 새로운 추상미술운동 가운데 ‘서법적 추상’이라는 경향이 있다. 필력과 거친 붓 터치, 붓에서 뚝뚝 떨어져 생긴 점 등으로 그림을 만드는 방법이다. 화선지에 붓으로 글씨 쓰듯 밑그림 없이 한순간에 무엇인가를 그려내는 것이다.
安禪(앉아서 명상에 들어가다): 30×35cm 한지에 혼합재료 2019
따라서 작가의 숙련된 손놀림과 순식간에 빈 화면을 구성할 수 있는 직관력 없이는 불가능한 그림이다. 서예의 직관적인 제작 태도를 서양에서 자신들의 방법으로 해석해 새로운 회화로 만든 셈이다. 그래서 서예의 필법에서 유래한 추상회화라는 뜻으로 ‘서법적 추상’이라고 부른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조형 언어인 붓글씨는 자연 형상이나 이치에서 뜻을 추출해 함축된 형태나 상징 기호로 보여주는 예술이다. 중국에서는 ‘서법’, 일본은 ‘서도’, 우리나라는 ‘서예’로 부른다. 종주국인 중국은 글씨의 법을 세우고 이를 따르는 것으로 보았고, 일본에서는 붓글씨 쓰는 행위를 통해 정신 수양에 이르는 길로 해석했다. 반면 우리는 글씨와 글의 조화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키려고 했다. 붓글씨를 예술로 보았던 것이다.
쓰는 법이 정해져 있는 붓글씨를 예술의 경지로 이끌려면 창의적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고민은 서예계에서는 물론 현대 미술계에서도 한다. 그래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豫則立(미리 준비하면 이루어진다): 40×60cm 한지에 혼합재료 2019
김옥봉도 그런 흐름을 이끄는 작가다. 그는 전통 서예를 바탕으로 회화적 방법론을 모색한다. 서예의 전통적 기법을 현대 회화의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내려는 다양한 실험을 보여준다. 서예 영역을 허물어뜨리지 않고 회화적 방법을 접목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진부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적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글씨가 가지고 있는 조형성과 의미를 함축해 보여주는 상징성을 중심에 두고 서양 추상회화의 방법론을 끌어들이는 셈이다.
이런 방법을 고수하기에 그의 작품에서는 글씨가 돋보인다. 배경에 등장하는 추상적 기법의 회화 요소는 글씨에 담겨 있는 글의 의미를 떠받치는 요소일 뿐이다. 김옥봉의 서법적 회화가 새로워 보이는 이유다.
전준엽 화가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