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중·서능욱보다도 빨라…아마 땐 내기바둑계 ‘넘버2’, 프로 땐 ‘박진감 넘치는 바둑’ 인기몰이
테스트 겸 두 점을 놓으라고 했는데 싫은 표정이 역력하다. “그럼, 내가 특별히 한 판만 이기면 치수 고쳐줄게. 한번 잘 둬봐.” 당시는 혈기왕성한 30대, 빠른 손으로 명성을 날리던 시절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같은 템포로 두는데 바둑은 전혀 안 밀린다. 이기고 지고를 떠나 ‘속도’에서 맞짱을 뜨니 승부사의 자존심이 끓어올랐다. 알고 있던 초강수를 다 동원해 끊고 싸워 힘으로 눌러버렸다.
일요신문과 인터뷰 중인 정대상 9단.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투정 부리는 듯한 말투엔 순수한 소년의 감성이 물씬 느껴졌다. 사진=박주성 제공
대마가 잡히고, 돌을 거둔 아이는 마치 교통사고라도 당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했다. “너 참 잘 두는구나. 운이 좋았어. 여기서 실수 안 했으면 내가 졌네”라고 위로해줬는데 단 한마디 변명이 없다. 아무 소리도 안 하는 게 아주 묘한 느낌이었다. 질 거라곤 상상하지 못해서였을까. 조금 있다 권 원장이 돌아왔다.
“어휴, 방금 여기서 두 점으로 한판 뒀는데 아주 잘 두더라고. 꼬마애가….” “헉, 어떻게 두 점을 접었어? 여기 프로사범들에겐 선으로 두는데. 며칠 전 해태배에서 우승한 이세돌이라고 해.” “그런가? 이해가 안 가면 1만 원 후원해라, 다시 둬 줄게.” 다시 소년과 마주했고, 흑돌 두 개를 반상에 올렸다. 얼마 안 되어 지폐 한 장이 주머니로 들어왔다.
1982년 입단한 정대상 초단. 사진=한국기원
정대상은 9단이다. 입단 38년 차 프로기사다. 그 흔한 우승기록 하나 없지만, 속기와 파워 넘치는 전투력으로 수십 년 동안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초단 시절 인터뷰에서 20년 후 정대상을 묻더라고. 그냥 ‘9단은 되었을 것 같다’라고 말했는데 이미 소원을 이뤘지. 당시는 승단이 아주 어려웠거든.”
1987년, 한 일간지에서 전체 프로기사 제한시간표를 합산해 조사했는데 가장 시간을 적게 쓴 1위가 정대상이었다. 속기로 유명했던 김희중, 서능욱을 제친 기록이었다. 어떻게 속기를 그리 잘 두느냐고 묻자 “이건 자랑이 아니야. 한번은 당시 동료 프로기사들이 집에 놀러 와서 와이프에게 ‘정 사범이 속기에 일인자다. 전체 프로기사 중 1등이다’라고 칭찬해준 적이 있었어. 그러니 와이프가 ‘빨리만 두는 거지, 이기는 게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더라”라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맞잖아. 빨리만 두면 뭘 해? 이겨야 가치가 있는 거지. 할 말이 없더라고.”
11세 소년은 할아버지가 두던 바둑을 구경하며 반상 19로에 빠졌다. 관심을 보이자 아버지가 초등학교 동대문 근처 기원에 데려가 줬다. “기원에서 1급이라는 아저씨에게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지. 1968년 12월부터 시작해 6개월 만에 ‘물 1급’ 소리를 들었다.” 이후 서울 시내 기원을 전전했다. 중학생 시절엔 방내기계에서 일인자로 불리던 L 씨를 만나 마공(?)을 전수받았다. 뭘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고수를 엮는 법”이라고 말한다.
“나도 명색이 1급이었는데 그분에겐 여섯 점부터 깔고 다시 수련했어. 스승으로 모시고, 내주는 사활 문제만 지독하게 풀었지. 그때는 내가 사활귀신이었어. 머리가 팍팍 돌아갈 때라. 말 그대로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응용했지.”
프로에게 두 점 놓고 배우는 정도 실력이 되었다. 처음 나간 학생바둑대회에서 3위에 입상했다. 무명 소년의 놀라운 실력에 주목한 충암고에서 그를 특기생으로 받아줬다. 허장회, 강훈 등이 학교생활을 같이한 선배다. “축, 장문만 안 되면 끊고 뒀다. 수를 좀 빨리 보던 시절이다. 입단은 생각 자체가 없었고, 그냥 바둑이 좋아서 뒀어. 주로 대마 잡는 재미였지. 정통파 수법도 공부했지만, 그런 바둑은 재미가 없어서…. 실력은 약했지만, 속기로 치수고치기 하면 선배들도 두 점까지 내려가곤 했다.”
졸업하고 교복을 벗자마자 본격적으로 내기바둑 세계로 뛰어들었다. 1970년 말 내기바둑은 기원에 웅크리고 있던 간판스타 1급들이 우열을 겨루던 색다른 무대였다. 제한시간은 없었지만, 쓸데없는 곳에서 장고하면 뒤에서 구경하던 스폰서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속기에 달인급이던 정대상은 물 만난 고기처럼 약동했다.
“내기바둑계 서열 2위였어. 단 한 명을 빼곤 내가 서울 시내를 평정했지. 한번은 나이 어린 K(현 프로기사)가 유명한 신당동 Y를 누르고, 갑자기 신흥강자로 떠올랐어. 바로 내가 나서서 3연승으로 제압했지. 원래 네 판을 둘 예정이었는데 세 판 지고 나선 그쪽 스폰서가 약 올라서 타월을 던지더라고.” 정식 아마바둑대회도 자주 나갔다. “그전까진 좀 약했는데 1979년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자신감이 붙었어. 입단대회는 몇 번 나갔다가 1980년에 처음부터 본선에 올랐지. 본선멤버 12명 안에 들면 전국대회 우승자급으로 쳐줬던 시절이야.”
정대상 9단은 그가 만난 입단 전의 기재 중 최고로 이창호를 꼽았다. 1987년 이창호 초단(오른쪽)과의 승단대회 대국. 이창호의 스승 조훈현이 대국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한국기원
정대상 9단은 꼬마 이세돌과의 추억에 대해서도 풀어놓았다. 1991년 6월 초등 2년 이세돌(오른쪽)이 해태배 전국어린이바둑왕전 결승에서 한종진을 꺾고 우승하는 모습. 사진=한국기원
#우선 외상, 그리고 이긴다
입단 후에는 다시 유유자적했다. “아마 시절은 한판이 절실했는데 프로가 되니 바둑은 언제든 둘 수 있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래도 이기려고 맘만 먹으면 반드시 이겼다. 에피소드 하나. 신혼시절 집엔 전화가 없었다. “1985년이었지. 전화 가설비 1만 5000원이 없었어. 와이프에게 내가 내일 시합 이길 테니까 외상으로 당장 설치하라고 시켰지. 그게 제21기 패왕전 예선결승이었어. 바둑이 엄청 불리했는데 전화 때문에 악착같이 따라붙어서 간신히 한 집반을 이겼네.” 상대는 당시에 잘 이기지 못했던 장수영 8단이었다.
에피소드 둘. 정대상 3단은 1987년에 월간바둑이 주최한 ‘선풍대결’에 참가했다. 프로기사 정예 5강과 신예 5강이 겨룬 연승전 방식 이벤트 대국이었다. “대국 날짜가 나왔어. 일주일 전에 와이프하고 세 살배기를 데리고 제주도에 갔지. 거금을 쓰고 로열젤리까지 사 왔어. 계산해보니 한판만 이기면 여행경비는 뽑을 수 있었거든. 한 판만 이겼지.” 이 대국 상대도 공교롭게 장수영이었다.
1987년 월간바둑 주최 ‘선풍대결’에서 정대상 3단이 장수영 8단과 맞붙었다.
이창호, 박영훈, 원성진 등 그의 손을 스쳐 간 아이들이 나중에 프로가 되고, 지나치며 만날 때 꾸벅 인사할 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한다. “사람이 혼자 힘만으론 클 수 없어. 물론 내가 스승은 아니지. 그냥 트레이닝 파트너야. 야구로 치면 타격코치 정도지. 그래도 그들이 커가는 데 나도 일조는 했다고 생각해.” 입단 전의 기재 중 누가 최고였는지 묻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창호”라고 말했다. “1986년인가 이창호 입단 전에 전주로 내려가서 50번기를 뒀어. 내가 연구생들은 아주 잘 잡던 시절이야. ‘초속기’에 ‘호선’으로 둔 대국에서 이창호가 16승을 했지. 이후에도 10세 무렵 어린 기재들과 많이 두었지만, 다들 이창호급은 아니었어.”
언제 들어도 구수한 입담이다. 1957년생, 벌써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투정 부리는 듯한 말투엔 순수한 소년의 감성이 물씬 느껴진다. 집안 형편이 크게 여유가 있진 않았다. 젊은 시절 입단대회엔 참가비가 없어 못 나간 적도 있었다. 그래도 삶이 짓누른 구김살 하나 없다. 얼굴엔 언제나 장난기 어린 악동의 웃음과 위트가 가득하다. 바둑팬들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바둑”이라 좋아해 줬다고 한다.
“할 줄 아는 게 바둑밖에 없었다”는 아마추어로 12년, “버거운 상대를 만나면 지뢰를 심고 기다렸다”는 프로기사로 38년. 입단 후 공식대국 전적은 1248전 641승 607패. 많이 졌다고 엄살을 부렸지만, 막상 살펴보니 승률 51%가 넘었다. 바둑과 함께한 50년이 즐거웠을까? 웃음과 함께 돌아온 답은 간명했다. “뭐, 난 잘~~ 놀았지.”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