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문 방식 궁여지책, 공백기 우려 일부 환자들 불법 알고도 ‘직구’…식약처 “수입 허가 등 고려”
19개월 아이를 둔 김태영 씨는 최근 불안하다. 웨스트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아이에게 먹일 의료용 대마인 CBD 오일이 끊길까봐서다. 웨스트증후군은 뇌전증(간질)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병이다. 국내 의료용 대마 수입·판매 독점권을 가진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희귀약센터)는 최근 2000병을 한꺼번에 구입해 물량을 확보하는 방식에서 50병씩 개별 주문하는 방식으로 CBD 오일 수급 정책을 바꿨다. 신청하면 일주일 안에 받을 수 있던 CBD 오일이 이제 빠르면 16주, 늦으면 20주까지 걸릴 예정이다. CBD 오일은 주로 뇌전증 환자에게 쓰인다. 경련과 발작을 멈춰준다.
CBD 오일은 해외 대마숍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 오른쪽 칸나비디올(에피디올렉스)이 국내 의료용 합법화 대마다. 하나는 건강기능식품이고 다른 하나는 의약품이지만 효과는 같다. 사진=박현광 기자
그런데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환자 개인이 한 번에 보유할 수 있는 CBD 오일 용량을 3개월 치로 정해뒀다. 3개월 치를 처방받으면서 다음 3개월 치를 주문하더라도 불가피하게 환자는 약 없는 공백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의료용 대마를 합법화하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지난해 3월 12일 시행됐다. 전국의 뇌전증 환자를 둔 부모들은 그땐 웃었지만, 딱 1년이 지난 시점에선 웃을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 셈이다.
결국 돈 때문이다. 식약처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희귀약센터는 CBD 오일 수급 정책을 틀 수밖에 없었다. 전시행정 논란이 이는 이유다. 국내에서 제조와 생산을 할 수 있도록 시행령을 고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마약류관리법 개정안은 국내 의료용 대마 제조와 생산을 허용하지만 시행령에서 이를 막고 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때만 관심을 가지며 개정안을 발의했던 국회의원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CBD 오일 구매까지 긴 시간이 걸려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문제는 1년 전 시행령이 발표됐을 때도 똑같이 제기됐다. 식약처는 비판 여론이 일자 희귀약센터에 내년 예산 지원을 약속하고 CBD 오일 초도 물량 2000병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희귀약센터는 은행에서 20억 원을 빌려 이를 시행했다. 1년이 지났지만 식약처는 예산안 확보에 실패했다며 희귀약센터에 약속했던 예산을 주지 않았다. 희귀약센터가 CBD 오일 수급 정책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결국 희귀약센터는 지난해 12월 뇌전증 환자 가족에게 CBD 오일 수급 정책이 바뀐다는 공지를 했다. 그사이 누군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던 뇌전증 환자 가족들은 이달 초부터 우려했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예산을 두고 갈등을 빚던 식약처와 희귀약센터는 부랴부랴 방안을 마련했지만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식약처와 희귀약센터는 기존 CBD 오일 구매 절차를 살짝 비틀었다. 환자가 의사 처방전 없이도 CBD 오일 구매를 신청할 수 있게 했다. 환자가 ‘예치금’ 명목으로 180만 원을 희귀약센터에 입금하면, 희귀약센터는 미리 물량을 주문해두는 방식이다. 환자가 3개월 치를 다 복용하고 의사에게 처방전을 받아 식약처 승인을 거친 뒤 희귀약센터에 신청하면 최대한 빨리 CBD 오일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계산이다. 이 방식은 3월 초부터 시작됐다. 궁여지책인 셈이다.
기존엔 CBD 오일을 구매하려면 환자는 의사에게 먼저 처방전을 받아야 했다. 처방전을 가지고 식약처의 승인은 얻은 뒤 희귀약센터에 신청하면 희귀약센터가 CBD 오일 수입을 시작하거나 확보해뒀던 CBD 오일을 바로 판매했다.
식약처와 희귀약센터가 마련한 방안도 뇌전증 환자가 버텨야 할 공백기를 메우진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잇따른다. 희귀약센터는 CBD 오일 구매 신청을 낱개로 처리하지 않고 50병이 돼야 발주한다. 낱개로 해외직구를 하면 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에 공동구매를 하는 셈이다. 희귀약센터에 따르면 50병 구매 신청을 받는 데까지 2주에서 한 달 정도 걸린다고 예상된다. 에피디올렉스 제조사인 영국의 GW 파마슈티컬스에 물량을 신청하면 우리나라에 도착하기까지 14주에서 16주가 걸린다.
결국 빨라야 16주에서 늦으면 20주까지 걸린다. 환자가 최대로 보유할 수 있는 3개월(12주) 치를 넘는다. 또 택배 배송이 안 되고, CBD 오일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서울에 있는 희귀약센터가 유일하기 때문에 지방에 사는 환자라면 며칠 더 걸릴 수 있다. 공백기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강성석 의료용대마합법화운동본부 대표가 의료용 대마 처방 확대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강성석 의료용대마합법화운동본부 대표는 “뇌전증 환자는 영·유아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뇌전증 환자에겐 공백기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호흡곤란, 근육강직, 근육실조나 급성 발작으로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의 웨스트증후군 아이를 키우는 김태영 씨는 “아이가 하루 0.6cc 먹었는데 용량이 늘어서 1.2cc 먹는다. 개인이 집에서 정확하게 눈금에 맞춰서 용량을 지키기도 불가능하다. 항상 불안한 상황에서 공백이 생길 수가 있다고 하니 너무 답답하다”고 전했다.
공백기 우려와 까다로운 약 수급 절차는 환자 가족들을 범죄자로 내몰 가능성도 크다.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선 건강보조식품으로 허가 없이 누구나 CBD 오일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고 전해진다. 익명을 요구한 한 뇌전증 환자 어머니는 “주변에 실제로 해외에서 직구해서 CBD 오일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걸로 안다”며 “세관에 걸리면 범죄자가 되지만 솔직히 아이를 돌봐줄 사람만 있다면 한번쯤 시도해볼 것 같다”고 털어놨다.
시행령을 고쳐 민간 제약업체에 CBD 오일 수입·판매 혹은 제조와 생산 권한을 줘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강성석 대표는 “모법에선 식약처장 승인만 있다면 민간 업체도 의료용 대마를 수입하거나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식약처가 시행령에서 그것을 막고 희귀약센터에 독점권을 줬다”며 “지금이라도 시행령을 개정하면 이 문제는 풀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의료용대마합법화운동본부 회원들이 의료용 대마법 국회통과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개정된 마약류관리법을 보면, 3조 7항에서 ‘대마를 수출입·제조·매매하거나 매매를 알선하는 행위. 다만, 공무, 학술연구 또는 의료 목적을 위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의 승인을 받은 경우는 제외한다’고 돼 있다. 식약처장 승인만 있다면 민간 제약업체의 대마 수출입과 제조가 가능하다. 하지만 식약처는 시행령에서 희귀약센터만 해당 행위를 할 수 있게 제한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법을 한 번에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지난해 제한적으로 희귀약품센터에 권한을 준 것”이라며 “민간에 권한을 주면 불법 유통될 위험도 있다. 중장기적으론 대마를 수입품목 허가 약품으로 지정하는 등의 여러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CBD 오일이 필요한 환자 가족들 사이에선 대마 합법화가 화제가 됐을 때 잠깐 등장했다가 빠진 정치인과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크다. 강성석 대표는 “이슈가 될 때만 숟가락 얹고 이렇게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올 땐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기자회견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해도 무시한다”고 지적했다.
‘대마 합법화’를 주요 골자로 하는 마약류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그 공로로 한 언론사에서 ‘최우수법률상’을 받기도 한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법안을 발의한 건 맞지만 해당 상임위가 아니라서 대마 이슈를 팔로우하진 못했다”고 답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