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증권사간 CB 매매서 의도치 않은 쿠션 역할…펀드 수탁사로서 감시 기능 ‘제로’ 비판
1조 6000억 원대 규모의 환매가 중단된 라임자산운용 사태로 국내 사모펀드 제도 전반의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 2019년 10월 14일 원종준 라임자산운용 대표이사가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에서 라임자산운용 펀드 환매 연기 관련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금융권 대표적 ‘신의 직장’으로 꼽히는 한국증권금융은 국내 유일의 증권금융 전담 회사다. 증권을 담보로 금융투자업자에 자금을 대출해주거나 투자자 예탁금을 맡아 운용하는 등의 업무를 한다. ‘증권사를 고객으로 하는 은행’인 셈이다. 지난 3월 24일에는 정부 대책에 따라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단기자금 시장 유동성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한국증권금융의 주주는 증권사와 은행 등 증권 관계기관으로 구성돼 있으며, 최대주주는 지분 11.3%를 보유한 한국거래소다.
한국증권금융은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지만, 금융사 가운데서는 갑의 위치에 있는 주요 기업이다. 증권거래법에 따라 증권사는 투자자 예탁금을 한국증권금융에 의무적으로 예치해야 하고, 한국증권금융은 예탁금 예치 이자를 확보해 운용한다. 라임과 증권사 간 수상한 CB 매매에 의도치 않게 한국증권금융이 이름을 올린 까닭은 라임 사모펀드 수탁사이기 때문이다.
#얼굴마담 역할을 한 한국증권금융
라임은 모든 코스닥 상장사 공시에서 어느 곳으로부터 CB를 장외매입하고 어느 곳에 CB를 장외매도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라임의 CB 거래에 있어 한국증권금융이 간판이 된 대표적인 사례는 폴루스바이오팜. 폴루스바이오팜은 2018년 3월 8일 공시를 통해 KB증권과 한국증권금융을 대상으로 각각 100억 원씩 총 200억 원 규모의 전환사채 납입이 완료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증권금융은 라임 펀드의 수탁사라 공시에 이름이 올랐을 뿐 실제 폴루스바이오팜의 CB 발행 대상 기업은 라임이다.
라임이 자기자금을 돌려 CB를 발행, 매입‧매도하며 주가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블러썸엠앤씨 공시에서도 한국증권금융이 등장한다. 라임이 매입한 CB가 ‘라임→한국증권금융→DB금융투자→한국증권금융→라임’ 순으로 이동한다. 블러썸엠앤씨는 지난 2월 3일 공시 기준 라임이 지분 14.3%를 보유하고 있는 코스닥 상장사로, 지난 1월 리드 횡령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 아무개 현 오라엠 대표이사가 이끄는 피앤엠씨를 대상으로 500억 원 규모의 CB를 발행한 바 있다.
동양네트웍스(현 티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KB증권은 2019년 7월 30일 보유 중이던 CB를 장외매도하며 한국증권금융에 넘겼고, 같은 날 라임은 3차 CB를 장외매수했다고 공시하는 식이다. KB증권은 이외에도 다수 코스닥 상장사에서 CB를 매입해 라임에 넘기거나, 라임의 CB를 넘겨받았다. 그러나 공시에서는 한국증권금융과 CB매매를 한 것처럼 표시됐다.
한국증권금융 홈페이지에 설명된 신탁업자의 업무. 운용사 운용지시에 대한 감시 행위가 명시돼 있다.
#감시 없는 수탁사의 한계
한국증권금융은 2004년 증권업계 최초로 펀드 수탁업무를 시작했다. 이전에는 은행이 독점해왔다. 운용사는 각 펀드를 설정하면서 펀드 자산을 보관해줄 수탁사를 선정해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시중은행과 한국증권금융이 최종 수탁업무를 맡고 있다. 펀드 수탁사는 수수료를 받고 펀드자산의 보관과 관리, 자산의 취득 및 처분 이행, 운용지시에 대한 감시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라임 사태를 보면 한국증권금융이 실상 수탁사로서 운용사 운용지시에 대한 감시 역할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한 한국증권금융 관계자는 “실제로 자금을 투입해 직접 운용한 것이 아니고, 펀드 수탁업무를 맡고 있어서 공시된 것”이라며 “수탁사로서 수동적으로 운용사의 지시를 받아 처리한 건”이라면서 “수탁사로서 (한국증권금융이) 움직인 것은 거래가 있었다는 의미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설명했다.
라임 사태 이후 사모펀드 실태점검을 실시한 금융당국은 지난 2월 14일 ‘사모펀드 현황 평가 및 제도 개선 방향’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명목상 존재하던 수탁사 등의 감시 역할을 명시하는 동시에 공모펀드와 마찬가지로 사모펀드도 관리부실이 확인될 경우, 형사처벌과 기관 및 임직원 제재 등 행정조치를 받게 된다. 향후 구체적인 규제 가이드라인이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의 한국증권금융 관계자는 “현재 사모펀드는 기준가 산정액이 적정한지 확인하는 의무 외에는 운용행위 감시 의무는 법상으로 없다”며 “기준가격 적정성은 공시 기준가로 매일 확인하고 있다”고 답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