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여파 17만 명 중 8만 명 투표 불가…역대 선거 진보정당 우위였지만 지역구 영향 미미
4월 1일 중국 베이징 주중대사관에서 설치된 투표소에서 주중대사관 재외선거관리위원회 선거사무원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재외국민 선거는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재외선거인과 국외부재자에게 투표권을 보장하는 제도다. 2009년 2월 공직선거법 개정에 따라 2012년 19대 총선에서 처음 시행됐다. 이에 따라 재외국민들은 18·19대 대선과 19·20대 총선에서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지방선거에선 재외국민 선거를 실시하지 않는다.
여기서 재외선거인은 국내 주민등록이 돼 있지 않은 선거인을 칭한다. 재외선거인에겐 비례대표 의원선거 투표권만 부여된다. 국외부재자는 국외에 일시 체류 중인 선거인을 말한다. 여행자, 유학생, 상사원, 주재원 등이다. 국외부재자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원 투표권을 모두 행사할 수 있다. 선관위는 117개국 176개소의 재외공관을 투표소로 지정해 재외국민 선거를 실시한다. 선거인이 밀집한 지역은 추가 투표소를 설치·운영할 수 있다.
4·15 총선 재외국민 선거는 4월 1일 시작됐다. 선관위는 “4월 1일 오전 5시 피지대사관 재외투표소를 시작으로 전 세계 66개국 96개 투표소에서 재외국민 선거가 막을 올렸다”고 했다. 선관위 재외선거과 관계자는 “기존 재외공관 투표소 90개를 비롯해 일본에 설치된 추가 투표소 6개소에서 투표를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재외국민 선거는 4월 6일 종료된다.
재외국민 선거 투표소는 총 182개소(추가투표소 6개소 포함)가 있다. 그 가운데 86개소(4월 1일 기준)가 코로나19 여파로 선거사무를 중지한 상태다. 선관위는 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 추세에 따라 일부 투표소에 대한 선거사무 중지를 결정했다. 재외국민 선거 실시를 우려하는 주재국 공식입장이 있거나, 주재국 제재 조치 강화로 재외국민의 안전이 우려되는 등 정상적인 재외선거 실시가 어려워진 투표소들이다.
우선 재외국민 선거인 밀집지역인 미국, 캐나다의 18개 투표소(미국 14, 캐나다 4)는 선거사무를 전면 중단했다. 유럽에선 48개 투표소 중 22개소만 정상 운영된다.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 주요 유럽국가 소재 투표소는 코로나19 여파로 선거사무를 일제히 중단했다.
또 다른 선거인 밀집지역 중국은 지역에 따라 선별적으로 투표소를 운영한다. 베이징 소재 주중 대사관 재외투표소를 비롯해 총 9개 투표소가 문을 연다. 코로나19 발원지로 꼽히는 우한 총영사관 재외투표소는 선거사무를 중단했다. 인도, 브라질, 러시아, 터키 등 4개국 역시 중국처럼 특정 지역에서만 선거사무를 정상 운영한다.
일본 역시 대표적인 재외국민 선거인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 일본 소재 재외국민 선거 16개 투표소는 모두 정상적으로 운영된다. 투표소 3곳이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재외국민 선거는 정상적으로 닻을 올렸다.
4월 1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의 체온을 측정하는 장면. 사진=연합뉴스
이는 재외국민 선거 투표율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일요신문 취재에 응한 한 재외국민은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현지 한인 사회도 바쁘게 대응하고 있다”면서 “국내 정치 관심도가 평소보다 많이 낮아진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그간 재외국민 선거 투표율은 ‘대고총저’ 양상을 띠었다. 대선 때는 투표율이 높고 총선에선 낮았다는 이야기다. 18대 대선에서 재외선거 투표율은 71.1%(15만 8225명)이었다. ‘탄핵 정국’ 이후 치러진 19대 대선의 재외선거 투표율은 75.3%(22만 1981명)이었다.
그러나 총선에선 투표율이 낮았다. 19대 총선 재외선거 투표율은 45.7%(5만 6456명)이었고, 20대 총선에선 41.4%(6만 3797명)로 집계됐다. 대선에 비해 총선을 바라보는 재외국민의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권에선 21대 총선의 재외국민 선거 투표율이 사상 최저치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재외국민 유권자의 투표 성향은 어땠을까. 역대 투표 결과에 따르면, 재외국민들 표심은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의 손을 들어줬다. 선관위가 발표한 2012년 18대 대선 재외국민 선거 개표결과에 따르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전체 유효 투표수의 42.8%(6만 7319표)를 득표해 56.7%(8만 9192표)의 문재인 통합민주당 후보보다 적은 표를 받았다.
‘장미 대선’이라 불렸던 2017년 19대 대선에서도 재외국민들 표심은 문재인 후보를 향했다.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재외국민 선거인으로부터 12만 886표를 얻었다. 재외국민 선거 유효표 가운데 59.0%였다. 3만 6073표(16.3%)를 얻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2만 5757표(11.6%)를 얻은 심상정 후보가 문 후보 뒤를 이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1만 7294표(7.8%)를 얻는 데 그쳤고,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9929표(4.5%)를 얻었다.
19대 총선과 20대 총선에서도 재외국민 표심은 진보정당을 향하는 흐름을 보이긴 했지만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은 아니었다는 게 정가의 분석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지역구 선거의 경우 재외국민 선거인이 던진 표가 지역구 별로 10표에서 1000표 사이”라면서 “재외국민 민심이 선거 결과를 좌우하긴 어려운 구조”라고 했다.
중국 베이징 주중대사관 투표소엔 유권자들의 코로나19 감염을 예방하려 1m 간격으로 대기 좌석이 마련됐다. 사진=연합뉴스
재외국민 선거가 지역구 선거 당락에 영향을 미친 적도 있긴 하다. 19대 총선 경기 고양 덕양갑 지역구에선 재외국민 선거 투표함이 열린 뒤 선거의 승패가 갈렸다.
당시 심상정 통합진보당 후보와 손범규 새누리당 후보는 개표 과정 내내 표 차이가 100표 안팎을 벗어나지 않는 대접전을 펼쳤다. 재외국민 선거 투표함은 개표 마지막 단계에서 열렸다. 재외국민 선거 투표자는 총 234명이었고, 그 가운데 148표가 심상정 후보를 향했다. 손범규 후보는 81표를 얻었다.
재외국민 선거에서 67표 우위를 확보한 심 후보는 이 선거에서 총 4만 3928표(49.37%)를 얻어 4만 3758표(49.18%)를 받은 손 후보에 170표 차이 신승을 거두며,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이 선거는 재외국민의 ‘진보 지지 양상’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정치권에선 이번 재외국민 선거에선 ‘좌성향 표심’이 무너질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 재외국민은 “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해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한 발언이 한인 사회에서 상당한 반감을 일으켰다”고 했다. 박 장관은 2월 2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코로나19 확산의) 가장 큰 원인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었다”고 발언해 논란의 중심에 선 바 있다.
박 장관 발언과 관련해 2월 28일 중국 한인회는 성명서를 냈다. 특정 지역 한인회가 정부를 상대로 공식 입장을 낸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중국 한인회는 “박 장관 발언으로 재중 한국 교민들은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면서 박 장관의 사과를 촉구했다. 중국은 투표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지역 중 재외국민 선거권자가 가장 밀집한 지역 중 하나다.
유럽에 거주하는 또 다른 재외국민도 “최근 들어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다”면서 “이런 요소들이 재외국민 선거 표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