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차마고도’형 한국의 ‘염두고도(鹽豆古道)’…가야시대 이후 영호남 교류 통로
지리산 콩소금길 ‘염두고도’(제공=김용근씨)
‘염두고도’ 저자 김용근씨
장수군 번암면에서 벽소령을 너머 화동군 화개까지 이어진 콩소금길은 1500여년 전 가야시대 사람들이 지리산 깊은 요새의 땅 운봉고원에 들면서 생겨난 길이다.
지리산 소금길의 출발지는 하동군 화개장터로 이곳에서 출발한 소금 짐꾼은 벽소령에 도착해 기다리고 장수군 번암면과 남원시 아영면에서 출발한 콩 짐꾼은 인월면과 산내면을 지나고 함양군 마천면을 거쳐 벽소령에서 만나 소금과 콩을 맞바꿔 오가던 125리 콩소금길이 ‘염두고도’(鹽豆古道).
지난 22일 남원시 아영면행정복지센터에서 경암 화개면과 장수군 번암면, 남원시 아영면·인원면·산내면, 함양군 마천면 등 콩소금길과 연결된 지역 6개 면장들과 등구사, 지리산국립공원, 지리산관광개발조합 등은 이 같은 소금길을 공동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동안 소금길은 역사성과 지리산 공동체의 소중한 생활형 자원임에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이날 처음으로 지리산 공동체 복원을 위한 소통과 생태적 관광자원 등으로 소금길의 가치를 확인된 것이다.
또 중국의 ‘차마고도’보다 깊고 사람 냄새나는 인문적 생태자원으로 영호남과 동서의 소통 매개물로서 콩소금길의 가치를 인식하고 ‘염두고도’라 지칭하며 꾸준하게 연구해온 현직 공무원이자 향토사학자가 있어 화제 인물로 급부상하고 있다.
아영면사무소 김용근 총무계장이 그 주인공으로 남원에서 35년 동안 공무원으로 일하며 광한루 600년 이야기를 비롯 판소리 사설 사전, 남원정명 1260년, 가야 기문국 크고 작은 이야기, 가왕 송흥록 동편제 등 20여권이 넘는 향토사 자료를 펴낸 향토사학자이다.
김씨가 올해 4월 소금과 콩길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정리한 ‘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 - 소금과 콩)’를 전자책으로 발간했고 소금길을 세상에 드러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 소금길의 역사와 가치는 ‘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 - 소금과 콩)’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지리산 소금길의 시작은 1500여년 전 가야 기문국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철의 왕국이라는 가야의 나라 기문국은 첩첩산중 지리산 속에 든 나라였다. 사람살이에 가장 중요했던 소금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나가는 길은 지리산 화개재를 너머 하동으로 가는 길뿐이었다.
그때부터 생겨난 길은 운봉사람들이 서리태 콩을 짊어지고 화개재를 넘어 화개장터로 가서 소금으로 교환해 오는 소금길이 됐고 화개장터에서 유명했던 서리태콩 두부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운봉은 지리산 분지 속에 있는 작은 나라와도 같은 고을이었다. 외부 세계와도 소통이 쉽지 않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이곳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생활 세계를 가졌다. 먹고, 입고, 노는 것을 비롯해 심지어는 교육까지도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을 가졌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자급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소금이다. 지리산에서 소금나무라고 불리는 붉나무에서 가을에 열매껍질에 생긴 짠 성분을 소금 대용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소금이 부족해 지리산 벽소령을 넘어 화개장터까지 가서 소금을 구해왔다. 지리산의 소금길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던 것이다.
‘염두고도’는 어른들이 불렀던 콩소금길을 가리키고 있다. 지금도 간장소와 소금장수무덤 등이 흔적으로 남았다. 소금길의 시점은 전라북도 남원 두락이고 종점은 경상남도 하동 화개이다. 콩과 소금의 실체는 지리산 북서쪽 계곡의 간장소와 두락마을의 이름에 들어있다.
소금길에 놓인 간장소와 두락마을은 역사속의 문화적 음식이다. 두락마을은 가야 고분군의 집성지이다. 그곳에 콩이 풍성했다는 것은 콩을 재료로 한 음식이 생겨났다는 것이고 반드시 필요했던 소금까지 합해져 콩물과 마을, 고분군 등은 가야 기문국의 뿌리가 됐다.
조선시대 운봉사람들도 조상들처럼 서리태 콩을 짊어지고 벽소령과 화개재를 넘어 화개장터로 가서 소금으로 교환해 왔다. 화개장터의 유명했던 서리태콩 두부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30명으로 이뤄진 운봉현의 소금무데미(보부상 무리)들은 지리산 소금길을 넘나들면서 소금과 서리태 콩을 주고받으며 살았다. 소금무데미 선창꾼은 훗날 동편제 소리꾼이 되기도 했다.
지리산 염두고도의 정체성은 수많은 이야기 속에 들어있다. 벽소령 지게사돈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지리산 염두고도의 척추인 벽소령은 지게고개였다.
그 누구도 넘나들지 못했다는 고개가 지리산에 있었다. 호랑이 길목이었고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잡혀간 곳이었다. 어느 땐가 그 고개를 아주 자유롭게 넘나들던 사람들이 나타났다. 벽소령을 좌우로 살던 운봉고원과 장수, 함양마천 사람들과 하동 사람들이었다.
운봉고원은 땅 농사가 풍요로웠다. 특히나 콩이 그랬다. 하동 사람들은 바다 농사가 해마다 풍년이었고 소금은 더욱 그랬다. 콩은 소금이 필요했고 소금은 콩이 있어야 했다. 그 둘의 만남은 역사 이래로 염원이었고 그 둘의 이해관계는 사람에게 들여졌다.
운봉고원 사람들은 지게에 콩을 지고 소금을 찾아 나섰다. 하동 사람들은 소금을 지게에 지고 콩을 찾아다녔다. 지리산이 가로막혔고 호랑이가 길목을 지켰으나 양쪽 사람들의 벽소령 넘나들이를 호랑이도 막지는 못했다.
운봉고원 사람들의 콩지게 30개가 일렬로 서서 고개를 오르고 내릴 때 하동 사람들의 소금 지게 30개가 고개를 오르내릴 때의 뒷모습은 호랑이가 가장 무서워하는 지게 귀신이 됐다. 다리 60개가 달린 처음 보는 괴물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넘나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벽소령은 그렇게 오랜 금기를 깨줘야만 했다. 훗날 매월 보름날이면 콩 지게와 소금 지게가 벽소령에서 만났다. 두 무리의 콩 무데미와 소금 무데미들은 서로의 지게만 바꿔서 지고 돌아갔다. 그 인연은 아들딸들의 시아버지와 장인이 되게 했다.
그때가 지게 사돈 이야기의 탄생 시점이다. 벽소령은 염두사돈과 지게사돈의 발원지다. 사람살이 영호남과 동서 고개는 없었고 그 마중물은 지리산 ‘염두고도’이다.
김광채 남원시 아영면장은 “지리산 소금길은 중국의 차마고도보다 깊고 사람 냄새나는 인문적 생태자원으로 영호남과 동서의 소통매개물로서 지리산 공동체 복원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며 “이번 논의를 시작으로 동서 소통체의 자원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신성용 호남본부 기자 ilyo6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