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며느리 자르고 무사할 성싶더냐’
▲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
지난 4월 16일 정 전 회장은 서울중앙지검에 정수학원과 현인숙 이사장(49)을 상대로 사기 및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아들 정 아무개 씨(46)를 대리인으로 해 제출한 고소장에서 정 전 회장은 ‘2007년 현 이사장이 14억 원을 빌려주겠다고 말해 차용증을 써 줬는데 돈을 받지 못했다’며 ‘이후 받지도 않은 14억 원을 마치 빌려가 갚지 않는 것처럼 정수학원 임원들과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공무원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수학원은 1983년 정 전 회장이 강원도에 위치한 영동전문대학을 인수하면서 설립한 학교법인 재단이다. 처음 출범 당시에는 한보그룹 사명에 맞춰 한보학원으로 설립됐다가 2008년 지금의 재단명으로 바뀌었다. 정 전 회장과 갈등을 겪고 있는 재단의 현 이사장은 이전까지 재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외부인사로 지난 2007년 7월 취임했다. 과거 정수학원 및 강릉영동대학은 정 전 회장 도피자금의 출처 중 한 곳으로 지목받기도 했다.
정 전 회장이 소장에서 주장하고 있는 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지난 2007년 5월경. 정 전 회장이 횡령 혐의로 서울고법에서 재판을 받다가 일본을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도피했을 무렵의 일이다. 당시 지병 치료 목적으로 일본 가모가와 병원에 입원했던 정 전 회장은 그곳에서 현 이사장과 만남을 가졌다. 정 전 회장 측 인사에 따르면 둘 사이의 만남은 카자흐스탄 유전개발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강릉영동대학의 한 관계자는 “현 이사장이 2006년 지인의 소개로 정 전 회장과 인연을 맺었고 카자흐스탄 유전개발 사업 투자를 권유해 2007년 일본에서 만났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당시 만남에서 정 전 회장은 현 이사장에게 14억 원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 도피 자금 명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현 이사장 측에서는 ‘당시 돈을 빌려주고 차용증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 이사장은 지난 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정 전 회장이 고소장을 제출한 문제에 대해서는) 무고죄로 맞고소를 준비 중에 있다”고 밝혔다. 반면 정 전 회장 측에서는 ‘현 이사장이 차용증만 가져간 채 지금껏 돈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고소장을 제출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정 전 회장 측은 이미 3년여나 지난 지금에 와서 당시 돈에 대한 차용증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일까. 사실 이는 지난 2월 정 전 회장의 며느리인 김 아무개 씨(41)가 강릉영동대학 학장에서 해임된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설립자인 자신의 며느리를 현 이사장이 학장에서 해임하자 정 전 회장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 도망자 신세이면서도 현 이사장을 고소하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 강릉영동대학 홈페이지. |
검찰은 지난 2월 29일 춘천지법 강릉지원 형사1단독 이준철 판사 심리로 열린 김 전 학장 사건 결심공판에서 “정 전 회장의 도피자금 마련을 위해 거액의 교비를 횡령한 것은 중대한 범죄”라며 김 전 학장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또 횡령을 도운 혐의로 남편 정 씨에게 징역 2년, 같은 혐의로 학교 기획실장 송 아무개 씨에게 징역 1년 6월을 구형했다.
하지만 김 전 학장은 여전히 횡령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김 전 학장 측은 “자금을 횡령한 것이 아니며 모두 정상적인 방식으로 투자가 된 것”이라며 “일부 자금에 대해서는 회수 중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김 전 학장은 해임 역시 부당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김 전 학장은 지난 2월 19일 해명서를 통해 “지난 15일 이사회의 안건 중 학장 징계의 건은 당사자에게 통고된 바 없고 교육과학기술부에 질의한 결과 절차상 하자가 있었다”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정 전 회장 측에서는 이처럼 절차상의 하자에도 불구하고 교과부에서 학장 해임을 승인한 것이 근본적으로 현 이사장의 거짓말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현 이사장이 이사진과 교과부 공무원들에게 “정 전 회장이 거액을 빌려줬음에도 돌려주지 않았다”며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해 며느리인 김 전 학장의 해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한편 정 전 회장 측에서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이번 사건은 당시 만남 이후 현 이사장이 실제 돈을 빌려줬느냐 안 빌려줬느냐의 진위 싸움보다 강릉영동대학의 학내 분규로 더 크게 번지고 있는 모양새다. 강릉영동대학 ‘교협회장단’은 “설립자 정 전 회장에게 현 이사장이 거액을 실제 빌려주고 못 받은 것처럼 이사들에게 선전했고 교과부에도 관련 거짓 선전을 했기 때문에 학장 해임 등이 의결된 것”이라며 “5월 12일까지 이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는다면 이사장의 업무정지를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현 이사장 측은 “정 전 회장 측의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면서 “이번 사태의 본질은 고소장을 빌미로 정 전 회장 측과 가까운 교수 단체 등이 현 이사장 체제 흔들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학내 분규가 점차 심화되자 교과부는 지난 3일 정수학원에 대한 감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