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조 지원 ‘국내 연락책’ 있었나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이진한 부장검사)와 국가정보원은 국내로 위장 탈북해 황 씨를 살해하려 한 혐의로 북한 정찰총국 소속의 김명호 씨(36)와 동명관 씨(36)를 지난 4월 20일 구속했다. 이들은 탈북자 심사 과정에서 꾸며낸 인적사항과 동일한 지역 출신의 탈북자와 대질신문을 받다가 가짜 경력이 모두 탄로나는 바람에 황 씨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입국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두 직파간첩의 치밀했던 탈북 과정과 이들을 적발해 낸 국내 수사 기관의 검거 과정을 뒤쫓아가 봤다.
김 씨와 동 씨는 모두 지난 92년 9월 인민무력부 정찰국(현 정찰총국) 전투원으로 선발됐다. 정찰총국은 북한의 대남 및 해외 공작 업무를 총괄하는 곳이다.
정찰총국의 모태인 인민 무력부 정찰국은 과거 잠수함정을 이용한 대남 침투 임무 등을 주로 수행하는 등 대남 공작을 일삼아 왔다. 정찰국 소속으로는 4개의 저격여단과 5개 정찰대대, 국군 월북자들로 구성된 907부대나 북한군 유일의 여군 특수 공작조가 편성돼 있는 38항공육전여단 등이 있다. 정찰총국의 책임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은의 최측근이자 대남통으로 알려진 김영철 상장(한국군의 중장에 해당)이다.
김 씨와 동 씨는 1998년 북한 노동당에 입당했으며 2004년부터 공작원 신분으로 대남 침투 교육을 받은 것으로 조사결과 드러났다. 정찰총국에 선발된 이들은 92년부터 마동리 군사학교에서 사격과 무술을 배우며 ‘킬러’로 길러졌다. 맨손으로도 두세 명을 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암살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지난 20일 이들에 대한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서 국정원 소속 무술 요원과 법정 경위가 배치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도 했다.
착실하게 대남침투 교육을 받던 그들에게 지령이 떨어진 것은 지난해. 황 씨가 1997년 2월 한국에 망명한 지 13년이 흐른 시점이다. 정찰총국장은 이들에게 ‘황장엽을 살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국정원 측에서는 황 씨에 대한 암살 지령이 내려진 시기가 북한에 대한 황 씨의 비판이 극에 달한 시점과 거의 맞아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황 씨는 지난해 6월 KAL기 폭파범인 김현희를 만났으며, 9월에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책을 내면서 “북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북·중 동맹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또 10월에는 북한민주화위원회 개소식에 참석해 “공산주의를 내세우면 왕정복고식 후계세습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선군정치를 앞세워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라며 북한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12월에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창립 10주년 행사에서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족 교포 80만 명을 잘 포섭해 북한에 들여보내면 북한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황 씨가 북한 체제를 강도높게 비판하는 행보를 보이자 정찰총국은 두 사람에게 황장엽 암살 명령을 내렸다. 암살 명령이 떨어지자 김 씨는 새터민으로 신분으로 위장했고, 동 씨는 황 씨 친척으로 위장해 “황 씨 친척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승급하지 못하게 돼 탈북했다”며 치밀하게 국내 입국 계획을 세웠다.
두 사람은 지난해 11월 21일 만경대초대소를 출발해 원산과 함흥, 청진을 거쳐 회령에 도착해 사흘 뒤 밤에 탈북자로 위장, 몰래 두만강을 건넜다. 이들은 중국 지린성 옌지로 이동해 여관에서 지내며 민예관에서 요원을 만나 연락방법 등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40대 탈북 브로커와 접촉해 다른 탈북자와 섞여 태국 방콕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태국에서 경찰에 검거돼 강제출국 형식으로 각각 지난 1월 29일과 2월 4일 인천공항을 통해 국내로 들어왔다.
이들은 국내 입국 전 황 씨가 자주 다니는 병원이나 장소, 만나는 사람 등의 동향을 먼저 파악해 보고한 후 구체적인 살해 계획을 지시받아 실행하기로 했었다. 국내 입국에 성공할 때까지만 해도 이들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탈북자 심사 과정에서 덜미가 잡혔다.
동 씨가 “황장엽 씨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승진하지 못해 남조선을 택했다”고 말했지만 학력과 경력, 탈북 경위 등이 국정원이 축적한 대북 정보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 씨는 당초 황 씨에게 접근하기 쉽도록 황 씨의 친척인 ‘황영명’(8·15 기계화군단 중대정치지도원 중위)으로 위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황영명이 배치된 군부대에 군사 기밀이 많아 군대 경력을 외우기 힘들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국정원의 대북정보와 같은 지역 다른 탈북자의 대질 신문 과정에서 간첩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현재 국정원과 검찰의 타깃은 이들을 도운 국내 연락책에 맞춰져 있다. 두 사람은 순수한 탈북자로 가장하기 위해 공작금이나 무전기 등을 소지하지 않은 상태로 입국했다. 하지만 황장엽 씨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완수하려면 무기와 활동자금은 물론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는 황 씨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야만 한다. 결국 국내 고정간첩이나 친북단체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게 수사 기관의 판단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남파 공작원이라고 자백했지만 접선 대상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 동 씨는 “황 씨 암살에 성공하더라도 현장에서 투신자살하려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안당국은 이들이 북한에 남겨둔 가족을 걱정해 남한 내 접선 조직에 대해서는 자백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