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고위 관계자의 목소리는 높이 올라갔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의 말속에는 현재 SK그룹이 맞닥뜨린 난감한 현실이 그대로 담겨있는 듯했다.
SK그룹과 소버린자산운용. 지난해 4월 SK(주)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들의 지분경쟁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다음달 12일로 예정된 SK(주)의 주총에서 향후 그룹의 경영권 향배가 결정될 예정. SK(주)는 최근 경영권 분쟁이 불붙은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총에 못지 않은 올해 최고의 주총 격전지로 꼽힌다.
▲ 최태원 SK(주) 회장. | ||
특히 주총이 한 달가량 남은 상황에서 외국인의 지분이 순식간에 50%를 넘어서면서 최 회장측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SK그룹의 고위 관계자가 “주총 불안감 때문에 요즘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된 말만은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
현재 SK(주)를 구성하고 있는 주주는 크게 셋. 최태원 회장 등 오너일가와 소버린을 위시한 외국계 펀드, 그리고 소액주주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최태원 회장측은 다소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오너일가 이외에도 최 회장측의 우호세력을 자처한 곳이 많았기 때문.
산업은행, 하나은행 등 채권은행단이 SK그룹의 ‘백기사’를 자처하며 주식을 매입했고, 팬택&큐리텔 등 동종업계도 SK그룹 편에 섰다. 반면 소버린측은 국내에서 뚜렷한 지원세력을 기대하기는 다소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총을 한 달여 앞둔 현재의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졌다. 외국계 ‘큰손’들이 단숨에 SK(주)의 지분을 5% 이상 매입하는 등 최 회장측을 압박하고 나선 것. 증권업계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최 회장측이 이번 주총에서 유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외국인의 지분이 50%를 넘어선 만큼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최 회장의 확실한 우호지분은 SKC&C 8.49%, SK케미컬 3.23%, SK건설 3.34%, SK생명 0.45% 등 계열사 지분과 최태원 0.59%, 최재원 0.46% 등 오너일가 지분을 합친 총 17.45%. 여기에 SK(주) 자사주를 인수한 국내외 기관투자자 9.67%, SK그룹 파킹지분을 인수한 채권단 4.47%, 우리사주 4.43% 등을 합치면 최 회장측은 모두 36%대의 의결권을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현재 드러난 소버린측 지분은 이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 소버린자산운용 14.99%, 템플턴자산운용 5.04%, 헤르메스 0.7% 등 총 20%대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지난 1월27일 갑자기 SK(주)의 지분을 5.03%(12억7천6백38만3천7백10주)를 매입한 웰링턴자산운용을 소버린측 우호세력으로 보는 분위기다. 이렇게 될 경우 소버린측은 총 25%대의 우호지분을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외국인 지분율이 50%를 넘어섰다는 것을 감안하면 흩어져있는 외국인 보유량은 25%에 육박한다. 거기다가 SK(주)의 소액주주 지분율도 15%가량. 이들의 표심이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자 표대결에서 다소 열세인 소버린측은 최근 SK(주)의 소액주주 모으기에 혈안이 된 분위기. 소버린은 지난달 29일 소버린자산운용에 대한 소개를 담은 홈페이지를 정식으로 열고, 홈페이지를 통해 소액주주와의 대화 창구를 열어놓은 상태다.
그러나 SK그룹과 소버린의 대결은 단순한 ‘표대결’로만 가지는 않을 분위기다. 소버린측이 2대 주주의 자격을 내세워 SK(주)에 공개적으로 사내외 이사 5명을 추천했기 때문. 이들이 추천한 사람은 김진만 전 한빛은행장(사내이사), 남대우 신용보증기금 이사(사내이사), 조동성 서울대 교수(이하 사외이사), 김준기 연세대 교수, 한승수 전 주미대사 등 5명이다. 업계에서는 이들이 SK그룹의 사내외 이사로 선임될 경우 SK그룹 내부에 상당한 물갈이가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는 분위기다.
이렇게 되자 SK그룹은 발끈하고 나섰다. 소버린측이 사내이사까지 추천한 것은 다분히 ‘월권’행위라는 것.
SK그룹 관계자는 “대주주로서 얼마든지 이사를 추천할 수 있다. 하지만 소버린은 예전에 지분을 매입하면서 ‘투자목적’이라고 공시하지 않았나. 사내이사까지 추천하는 것은 경영권을 노리는 처사인 만큼 주식 보유목적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SK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최근 금감원은 소버린측에 재공시를 요구한 상황이다.
그러나 업계 안팎에서는 정부의 이 같은 제스처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모습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일단 공시를 요구했지만, 공시위반으로 주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고 밝혀 솜방망이 수위의 제재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했다.
이렇다 보니 최태원 회장 등 SK그룹 관계자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 국내 3위의 재벌 경영권이 정체모를 외국인에게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중대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