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솥뚜껑 손으로 발명하니까 신기해?”
▲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프로레슬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무웅 씨에 대한 첫인상은 강렬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옛날 얘기를 털어놓은 그는 어느 새 40년 전 경기를 막 끝낸 프로레슬러로 돌아간 듯했다. 선수 시절에도 튀는 행동으로 유명했던 그는 여전히 ‘튀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최근 홍 씨는 ‘전기밥솥응축기’라는 발명품을 만들어 특허를 받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특허만 해도 6개에 이른다. 지난 5월 20일 오후 을지로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드라마 같은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1세대 프로레슬러 홍무웅 씨. ‘박치기 왕’ 김일, ‘드롭킥의 달인’ 장영철에 가려져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그는 4개의 국내 챔피언 벨트를 지녔던 유일한 선수였다. 그는 약관 20세의 나이에 프로레슬링에 입문해 뛰어난 당수 솜씨를 자랑하며 국내 무대를 제패했다. 부산에서 당수 사범을 하던 그를 프로레슬링에 입문시킨 사람은 원로 프로레슬러 장영철 씨였다.
장 씨는 ‘목 감아 치기’와 ‘드롭킥’, ‘플라잉 헤드 시저스’ 등의 화려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큰 인기를 모은 초창기 한국 프로레슬링계의 대부였다. 홍 씨 역시 장 씨의 후원을 받으며 레슬링 선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장 씨를 따라 스파링도 하면서 레슬링을 배워보니 이게 진짜 남자다운 운동인거라. 그래서 시작했지. 일반 팬들은 김일이가 레슬링계의 대선배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게 아니거든. 김일은 내 후배야.”
그러나 홍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 씨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막노동판을 오가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한다.
“장영철 씨가 하루 아침에 나를 잘라 버린 거야. 왜 잘라 버렸냐하면 자기와 비슷비슷하게 가니까. 나이나 체격이나 뭐든지 좋았어. 그러니까 ‘저거는 범 새끼’다 하면서 자른거지. 그래서 내가 그냥 나와 버렸어. 막상 나오니 할 게 없었어. 그래서 을지로 인근 여관에서 지내며 막노동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김일이가 내가 있는 여관으로 찾아왔지. 도와달라면서. 그때가 김일이를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 씨가 일본에서 막 끌고 왔을 때야. 근데 와서 보니 장영철 씨가 프로레슬링계의 모든 걸 쥐고 있었거든. 난공불락이었어. 근데 나 혼자 쫓겨나서 막노동을 하니까 김일이 찾아와서 같이 한 번 해보자고 한 거지.”
김일의 등장은 당시 장영철 선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 프로레슬링계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이후 레슬링계는 장 씨를 따르는 세력과 김일 선수를 따르는 세력으로 양분됐다. 두 사람은 선수이자 프로모터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을 거치지 않으면 시합을 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김일 선수 밑에서 홍 씨도 전성기를 누렸다. 프로레슬링이 훨씬 더 앞서있던 일본에 원정 경기도 다녔다. 김일과의 동거가 계속되던 1977년 그는 한창의 나이에 레슬링계를 떠났다. 역시 김일 선수와 불화가 문제였다.
레슬링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는 프로레슬링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치며 자신만의 운동 철학을 풀어놨다. 그는 당시 활동하던 40여 명의 선수 이름은 물론이고 현재 최고 인기 종목인 이종격투기 선수의 이름도 술술 얘기했다. 운동에 대한 열정은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식지 않았다.
“영웅은 시대가 만드는 거지 자기가 만드는 게 아니야. 그 시절 시대적 상황에 김일이 나와서 인기를 얻었지 지금 프라이드 표도르랑 하면 한 방에 가는 거야. 지금은 배가 불러 선수들이 열심히 운동을 안 해. 우리는 진짜 배고파서 운동했거든. 열심히 했지.”
레슬링계를 떠난 후 선박에 들어가는 부품 업체 등을 운영하던 그는 조선소에 납품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노태우 정부 시절 ‘거북선 찾기’ 사업에 참여했다. 거북선 찾는 사업은 임진왜란 당시 전투에서 가라앉았던 거북선을 찾아 민족정기를 바로잡자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검찰에 구속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기자가 본 홍 씨는 ‘오기’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 무슨 일에든 한 번 꽂히면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오기’라는 말이 나오자 신이 나서 말했다.
“이 (레슬링 선수 시절의) 사진을 한 번 봐. 눈이 이게 어디 사람 눈이야. 독사눈이지.”
유산 문제로 친척들과 벌인 소송 과정은 그의 오기를 잘 대변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남긴 땅을 큰아버지가 우리 형제들을 제쳐두고 땅을 다 자기 이름 앞으로 해 놓은거야. 내가 오형제인데 다른 형제들은 다 돌려받는 걸 포기했지만 난 그렇게 못 했지. 소송을 했는데 상대편에서 고위 판사 출신 변호사를 샀어. 나는 어떤 변호사를 사도 이기기 어려워 보이더라고. 그래서 아예 변호사도 사지 않고 내가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의 도움만 받아서 각종 서류를 다 만들어서 소송을 했어. 재판장에 갔는데 판사가 나한테 이거 어디서 써 온 거냐고 묻더라고. ‘내가 썼다’하니까 재판장이 ‘어떻게 썼냐’라고 되묻더라고. 그래서 ‘아는 사람의 도움만 조금 받아 육하원칙에 의해서 썼다’고 했지. 그랬더니 판사가 대뜸 내가 써 온 답변서를 흔들어 보이며 ‘다른 변호사들도 이렇게 답변서 만들어 오세요’라고 하더라고. 그리고는 재판에서 내가 이겼어. 다른 형제들도 다 깜짝 놀랐지.”
프로레슬링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홍 씨가 꾸준히 해 온 일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발명이었다. 홍 씨는 선수 시절이던 지난 66년 ‘간판 및 화판용 휘광 유동판’이란 제품으로 처음 특허를 받은 이후 지금까지 총 6개의 특허권을 갖고 있다. 발명가 홍무웅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다.
▲ 1970년 일본으로 원정경기를 떠났을 때 신칸센 안에서 동경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모습. 오른쪽이 홍무웅. 왼쪽은 탤런트 천호진 씨의 아버지로, 유명한 원로 프로레슬러인 천규덕 씨. |
“당시만 해도 한국 주부들이 일본의 코끼리 밥솥을 써보는 게 큰 소원이었어. 그만큼 그 밥솥이 유행이었는데 희한하게 증기를 처리하는 장치가 없는 거야. 증기가 나와서 주부들이 화상을 입고 아이들도 다치는데도 말이지. 그래서 ‘아! 증기를 없애는 장치를 만들어서 일본 밥솥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게 쉽게 안 되더라고. 40년간 87가지나 되는 방법으로 장치를 만들었는데 한 번도 성공을 못하다가 얼마 전에 와서야 겨우 성공한거야. 88번 만에 성공했다고 해서 응축기 이름을 ‘88전기밥솥응축기’라고 붙였지.”
홍 씨는 응축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한 대형 가전업체와 적잖은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증기를 제거하기 위해 홍 씨의 아이디어를 이 가전업체가 응용해 제품을 상용화했기 때문이다. 이 가전 업체는 홍 씨에게 로열티 문제 등 계약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홍 씨의 기술만 가로채 이를 제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홍 씨는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더욱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 지난해 12월 특허청으로부터 특허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홍 씨는 레슬링 선수로 일하던 시절부터 발명가로 살아가기까지 수많은 배신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휴대폰에는 다음과 같은 좌우명이 적혀 있다. ‘내가 배신을 당하면 신이 나에게 전화위복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으로 생각한다.’
누구든 70세가 되면 새로운 인생을 꿈꾸기보다 인생의 마무리를 잘하기를 기대한다. 기자는 홍 씨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가 ‘내가 ○○하게 되면’이라는 가정법을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기대하고 꿈꾸는 것이 많이 남았다는 얘기다.
그런 그에게 70세가 되는 내년은 또 다른 인생의 출발점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