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 손에 쥐고 ‘검은돈’ 확인 중?
또한 그동안 철옹성처럼 여겨졌던 스위스 비밀계좌가 국내 조세기관의 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유력 정·관계 인사들의 해외 비자금 역시 더 이상 ‘무풍지대’가 아니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의도 정가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현 정권이 누구누구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호사가들의 설왕설래도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국세청 역외탈루 조사에 정치권을 비롯한 지도층 사회가 요동치고 있는 내막을 살펴봤다.
국세청 역외탈세추적전담센터는 조세피난처 등에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기업자금을 불법유출한 4개 기업과 사주를 조사해 탈루소득 6224억 원을 찾아내 3392억 원을 과세하고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고 지난 5월 25일 밝혔다.
이에 따라 이들 기업을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부도덕한 행위를 한 기업을 공개해야 다른 기업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세청은 이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고 있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세무조사를 담당한) 해당 부서가 고위 간부들이 물어봐도 알려줄 수 없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어 내부에서도 그 기업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국세청이 탈세 기업에 대한 공개를 지나치게 꺼리자 오히려 재계 일각에서는 불필요한 루머만 양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탈세 기업 공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국세청의 이번 조사가 눈에 띄는 것은 사상 처음으로 스위스·홍콩·싱가포르 등 이른바 조세피난처 계좌의 입출금 내용과 잔액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조세피난처란 회사에서 발생한 이익에 대해서 세금을 거의 부과하지 않거나 아주 낮은 수준의 세금만을 부과하는 국가를 말한다. 이런 나라들은 대부분 금융거래가 철저하게 익명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자금은닉이나 세탁이 용이하다.
이런 점을 악용해 일부 외국 기업들은 조세피난처에 현지 법인을 세워놓고 비자금 창구로 활용하다 당국에 적발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기업들 중에서도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세운 기업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조세피난처는 ‘누구나 알지만 쉬쉬하는’ 기업들의 은신처인 셈이다.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나라들은 익명성을 보장하는 것이 ‘생명’과도 같기 때문에 그동안 다른 나라들의 정보 제공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그동안 검찰 수사나 세무조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조세피난처에 자료 협조를 요청해 왔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사실 이번 국세청의 역외 탈루자에 대한 세무조사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왔다. 조세피난처의 계좌를 여는 것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왔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지난 2008년 11월 초 “유럽의 대표적 조세 피난처인 리히텐슈타인과 스위스 등의 비밀계좌 정보 입수에 나섰다”고 밝힌 바 있다.
이명박 정부의 적극적인 해외 비밀계좌 추적 방침은 ‘조세 투명화’라는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춘다는 점도 있었지만 현 정부 들어 국내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해외 비자금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유독 높았다는 점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 기업뿐만이 아니라 정·관계 유력 인사들의 해외 비자금 은닉설은 단골 메뉴처럼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노태우 비자금과 DJ(김대중 전 대통령) 비자금, 박정희 정권 실세들 비자금,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을 비롯해 재계 거물급 비자금 등이 대표적이다(박스기사 참조).
국세청이 본격적으로 유명 인사들의 해외비자금을 겨냥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올해 초 기자와 만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독일 정부와 협력해 유럽의 조세피난처로 잘 알려진 나라에 계좌가 개설되어 있는 국내 정관계·경제인과 관련한 명단을 넘겨받은 걸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독일 정부가 그동안 탈세혐의가 있는 정치인과 스포츠 스타 등에 대한 정보 제공을 주변 조세피난처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해왔으며, 지난 1월 독일 대통령이 국내에 방한했을 때 청와대 실무진이 독일 정부 실무진과 만나 한국정부가 독일정부를 통해 요청하면 독일정부가 한국정부를 대신해 이를 적극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또한 “최근 관련 정보를 극비리에 독일 정부로부터 넘겨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여기에는 전 정권 인사들이나 일부 현 정권 인사들과 관련한 비자금 내역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이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청와대 관계자의 발언은 관련 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으나 올해 국세청의 역외탈루자에 대한 세무조사를 보면 그저 ‘빈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세무조사 과정에서 조세피난처에 숨겨진 자금을 발견한 것에 시선이 모아지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여의도 정가에서는 벌써부터 국세청의 칼날이 정치인들이나 유력인사들의 해외 비자금을 향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국세청이 조세 피난처의 계좌 정보를 입수해 거액을 추징한 만큼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았던 유력 인사들의 해외비자금을 밝히는 것은 이제 세정당국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과연 세정당국은 이번 세무조사 성과물을 기폭제로 그 칼끝을 정·관계 유력인사들의 해외 비자금까지 겨냥할 수 있을까. 정치권을 비롯한 국내 거물급들의 시선이 세정당국으로 쏠리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