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감 중에도 갈취… 두 번 울렸다
▲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뜻밖의 제안에 현혹되어 자신의 전 재산을 날린 한 택시기사의 기막히고도 황당한 사연속으로 들어가봤다.
두 사람의 ‘악연’이 시작된 것은 지난 2005년의 어느날이었다. 부산에서 개인택시를 하는 박 아무개 씨(52)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개미’처럼 일만 하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는 영업을 쉬지 않았고 변변치 못한 수입이었지만 악착같이 돈을 모아왔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박 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부산 시내 곳곳을 누비며 운행을 하고 있었다. 박 씨의 택시를 세운 사람은 휠체어를 타고 있던 장애인 조 씨였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인 조 씨는 스스로 거동을 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박 씨의 도움을 받아 택시에 탈 수 있었다.
목적지로 향하던 중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택시기사와 승객 간에 나누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얘기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박 씨와 대화가 제법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조 씨는 슬그머니 사적인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 요즘 정말 골치아파 죽겠어요.”
“무슨 일 때문에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는 조 씨를 본 박 씨의 궁금증이 동했다. 이때만 해도 그것이 화근이 될 거라고 박 씨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은요…. 제가 처한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궁금해하며 재차 이유를 묻는 박 씨에게 조 씨는 다소 망설인 끝에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가 지금 유산소송을 벌이고 있어요.”
재력가인 아버지로부터 350억 원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재산에 욕심을 낸 계모와 유산을 놓고 법정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조 씨의 얘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의붓어머니와 돈 때문에 소송을 벌이고 있으니 마음이 착잡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남긴 재산인데 가만히 앉아서 뺏길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소송이라는 게 정말 쉽지 않아요.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사람 피를 말리는 일이에요. 그러나 보시다시피 제가 정상적인 몸도 아니고….”
조 씨의 얘기를 종합하자면 하반신 마비를 딛고 착하게 살아온 남자가 자칫하다가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의붓어머니에게 뺏길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조 씨의 ‘기구한’ 사연을 들은 박 씨는 그를 위로하며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자신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듯한 박 씨의 반응을 본 조 씨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돈 문제였다. 소송을 해서 이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만만찮은 소송경비를 댈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350억 원이 공중으로 날아갈 판에 소송비용이 없다고 그냥 손놓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어디 빌려서라도 소송경비를 마련해야죠.”
박 씨는 마치 자신의 일이나 되는 양 쉽게 포기할 일이 아니라며 조 씨를 설득했다. 그때였다. 조 씨는 박 씨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소송경비 일체를 지원해주면 재산관리인으로 선임하겠다”는 것이었다.
조 씨는 박 씨를 안심시키기 위해 350억 원이 들어있는 통장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는 사기행각을 벌이기 위한 조 씨의 치밀한 작전으로 숫자를 오려붙여 감쪽같이 위조한 것이었다. 통장의 실제 잔고는 3500원에 불과했다. 더구나 조 씨는 인터넷에서 찾은 대법관의 이름을 도용해 허위문서까지 꾸며 박 씨에게 내밀었다. ‘상속재산 소송을 심리하고 있는데 그중 500억 원을 대법원 금고에 보관 중이며 조만간 지급하겠다’는 어이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유산상속 문제나 소송 진행상황에 대해 무지했던 박 씨로서는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처음에 긴가민가했던 박 씨는 결국 조 씨의 치밀한 작전과 감언이설에 홀딱 속아 넘어가기에 이른다. 이후 조 씨는 박 씨에게 수시로 돈을 요구했고 박 씨는 소송비와 생활비 등의 명목으로 1년여에 걸쳐 4억 7000만여 원을 건넸다.
조사결과 돈이 부족했던 박 씨는 자신의 개인택시 면허와 살고 있던 집까지 처분하고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면서까지 조 씨에게 줄 돈을 마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결국 박 씨는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검찰에 고소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런데 검찰조사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박 씨를 이용한 조 씨의 사기행각이 드러난 것이었다. 결국 조 씨는 사기 혐의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조 씨가 구속된 후에도 두 사람의 악연은 끝나지 않았다. 조 씨는 교도소에서도 “내가 한 얘기들은 모두 사실이다. 350억 원의 유산이 국고로 들어갈 우려 때문에 불가피하게 검찰에 거짓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황당한 거짓말로 박 씨를 속였다.
그리고 2008년 6월 출소한 조 씨는 생활고에 쪼들리자 그 후에도 박 씨를 상대로 파렴치한 사기행각을 지속했다. “현재도 소송이 진행 중이고 소송경비를 충당하지 못하면 유산이 국고로 환수된다”는 조 씨의 말에 박 씨는 또다시 24차례에 걸쳐 약 2900만 원을 건넸다. 돈을 충당하기가 불가능해진 박 씨가 망설이자 조 씨는 “여기까지 와놓고 소송을 포기할거냐”며 압박했고, 이미 전 재산을 쏟아부은 박 씨는 조 씨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 씨는 서서히 박 씨를 피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전화도 받지 않은 채 잠적해버렸다.
결국 박 씨의 신고로 인해 조 씨는 검거됐고 5년 넘게 지속된 그의 사기행각도 끝을 맺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기였음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린 상황이었다. 집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날린 것은 물론 가정이 파탄날 위기에 처한 박 씨는 “그동안 들어간 돈이 워낙 많아서 반신반의하면서도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며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