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빠지는 상황 속 ‘흔들리지 말라’ 발언하자 일선 판사들 “정치권 눈치 보나” 불만
#재판 흐름·결과에 대해 쏟아지는 비판
9월 4일 친여권 성향의 방송인 김어준 씨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아내 정경심 동양대 교수 사건 1심 재판장인 서울중앙지법 임정엽 부장판사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임 재판장이 증인으로 출석한 최성해 전 동양대 총장 조카가 ‘정 교수에게 유리한 맥락으로 해석’해 진술하자 위증 경고를 하며 질책한 부분을 문제 삼은 것. 김어준 씨는 자신의 유튜브 방송인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서 “이 양반(임정엽 부장판사)은 이미 심증을 굳힌 것이 아닌가. 판사 변수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닌 가 그런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법원 내부의 불만은 김명수 대법원장을 향하고 있다. 개별 판사는 물론, 사법부 전체에 대한 비난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닐 정도로 일상화되는 등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었다’는 내부 여론에도 적극적인 대응을 전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정치권에서도 판사들에 대한 비판이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다. 광복절 당시 일부 보수단체가 주도한 광화문 집회를 허용(서울시의 옥외집회 금지 통고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 인용)한 판사에 대해 여당은 강하게 비판을 쏟아냈다.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후보로 나선 이원욱 의원은 8월 22일 합동연설회에서 해당 판사를 겨냥해 “국민들은 그들을 ‘판새(판사 새끼)’라고 한다”며 “그런 사람들이 판사봉을 잡고 또다시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정부 인사들도 참전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이를 결정한 판사를 ‘그 판사’라고 지목하며 “잘못된 집회 허가를 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라고 그런 결정을 하진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확진자가 생기고 전파되는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라고 문제 삼았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도 뛰어들었다. 추 장관은 “비상 상황에서 사법 당국이 책상에만 앉아있을 게 아니라 국민과 협조해야 한다”며 “(법원이) 사태를 안이하게 판단한 것으로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몰아붙였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8·15 집회 허가 판사 해임 청원’은 9월 16일 저녁 기준, 41만 명이 동의를 한 상황이다. 앞서 서울행정법원은 “코로나19 확산 우려가 있음이 객관적으로 예상된다”면서도 “실제 집회 시간이 4~5시간으로 짧을 것이며, 100여 명의 소수 인원이 참석해 사회적 거리 두기 준수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지만 이런 입장은 정치권에서 인용되지 못했다.
법원에서도 논란 후에 결정문을 공개하는 게 전부였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집회의 자유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고, 감염병예방법에 따라 집회를 제한할 때도 필요한 최소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추가로 밝혔지만, 이 정도로는 집중포화를 잠재울 수 없었다.
판사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은 “국민이 최후의 보루인 법원마저 믿지 못하고 있다”며 “법원의 신뢰회복이 절실하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비판을 보탰고, 여당은 아예 해당 판사의 이름을 딴 ‘박형순 금지법’까지 발의했다.
상황이 이렇자 판사들의 불만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익명의 한 판사는 “법원이 검찰 수사를 받을 때부터 조금은 예상했지만 최근 정치권에서, 특히 여당에서 맘에 안 드는 판단이 나올 때마다 법원의 판단을 문제 삼고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면 삼권분립 취지를 이해하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삼권분립의 헌법적 고민과 가치에 대한 진짜 고찰을 하고 있는지 우려스러울 정도”라고 비판했다.
#맞서지 못하는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쏠리는 비판
물론 ‘재판 결과에 대한 비판’은 판사의 숙명이라는 반응도 적지 않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법에 명시된 여러 가치들에 대해서 판사가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기에 어느 정도는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며 “판사가 국민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면 이를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는 설명을 판결 등에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토로했다.
익명의 한 판사는 “정치권, 특히 여당에서 맘에 안 드는 판단이 나올 때마다 법원의 판단을 문제 삼고 물고 늘어지는 데 삼권분립 취지를 이해하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서울 중앙지법 전경. 사진=임준선 기자
하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의 반응은 ‘그럼에도 최근 정치권의 공세는 과하다’는 것이다. 한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는 “국민들이 사법부 판단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과 정치권이 사법부 비판을 유도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개별 판사를 거론하면서 문제 삼을 경우 과거 독재 시절처럼 판사가 행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판단하라는 것이냐”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같은 불만은 자연스레 김명수 대법원장을 향하고 있다. 개별 판사는 물론, 사법부 전체에 대한 비난이 일상화되는 등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었다’는 내부 여론에도 적극적인 대응을 전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올 1월 시무식에서 “좋은 재판의 전제인 법관의 독립을 위협하는 움직임에 단호히 맞서 소신껏 재판할 수 있는 여건을 굳건히 지키겠다”고 강조했던 김명수 대법원장이지만, 이처럼 쏟아지는 정치권의 ‘좌표찍기’ 비난에는 맞서 싸우지 못했다. 오히려 9월 11일에는 판사들을 더 격앙시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김 대법원장은 11일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에 올린 ‘제6회 대한민국 법원의 날’ 기념사에서 “판결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넘어 근거 없는 비난이나 공격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으로 재판에 집중해 사회의 핵심 가치가 수호되고 정의가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오히려 “충돌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법과 양심의 저울로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면 어떤 풍파가 몰아쳐도 동요할 리 없다”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사회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시대의 흐름을 읽어 나가는 것도 사법부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필요하다. 익숙함에 대한 과신을 경계하고, 어느새 사회 현상과 조류에 둔감해져 있지는 않은지 항상 되돌아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법부 비판이 거세지고 있지만 판사들에게 ‘이에 흔들리지 말라’는 당부를 한 게 전부인 것. 정세균 총리 등, 정치권에서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서는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참으라고만 하는 것이냐”는 내부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처음 대법원장이 됐을 때부터 청와대 등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소문을 듣고도 ‘설마’라는 생각했는데 이제는 대법원마저도 판사들을 위해 맞서 싸우기보다는 정치권 눈치 보기에 급급한 것 같다”며 “개별 재판부의 독립을 위협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오히려 침묵하는 게 올바른 리더십인지 우려스럽다”고 쏟아냈다.
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상고법원’을 만들기 위해 정권의 눈치를 봤다가 적폐로 몰렸다면 지금 대법원은 무엇을 위해 눈치를 보는지 모르겠다”며 “독립성 침해에 대해 공개적인 반박도 나오지 않을 만큼 법원이 독립성을 잃은 것 같아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