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론 도리질 속으론 펌프질?
▲ 최근 “대우조선 인수 계획이 없다”고 밝힌 정준양 포스코 회장과 대우조선해양의 초대형 골리앗 크레인 설치 장면 합성. |
“향후 매물로 나오면 인수를 검토해 보겠다.”
지난 1월 14일 ‘포스코 CEO 포럼’에서 대우조선해양 인수 추진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정준양 회장은 이같이 답했다. 이날 정 회장은 또 다른 대형 매물인 대우건설에 대해선 “포스코건설이 있는 데다 시너지 효과가 적어 우선순위에 두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밝혀 대우조선해양 관련 발언이 인사치레가 아님을 보여줬다. 정 회장은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17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 후 기자들과의 자리에서도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인수 검토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정 회장이 돌연 입장을 바꿨다. 지난 5월 16일 철강협회 주최로 경기도 하남시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서 대우조선해양 인수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밝힌 것이다. 포스코 측은 “회장님이 인수 계획이 없다고 밝힌 만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입장이다.
정 회장의 5월 16일 발언 이전까지 재계와 금융권에선 대우조선해양의 새 주인을 사실상 포스코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포스코는 지난 2008년 GS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 참여했다가 입찰 직전 GS와의 가격 견해 차이로 컨소시엄이 결렬돼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러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한화가 재정 부담을 이기지 못해 결국 인수를 포기하면서 채권단의 시선은 다시 포스코로 향하게 됐다. 지난 수년간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위해 쌓은 노하우에 막강한 자금력까지 보유한 포스코를 위협할 다른 후보가 없다고 여겨진 것이다. 포스코 역시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통해 조선과 해양플랜트 사업의 진출, 그리고 안정적인 후판 공급처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기에 절대 포기할 수 없을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변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포스코의 외국인 주주들이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반대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온 것이다. 포스코의 외인 주주 지분율은 48.8%에 이르는 만큼(6월 9일 현재) 정 회장을 비롯한 포스코 수뇌부의 의사 결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히 지난 3월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회장으로 있는 버크셔 해서웨이 측이 포스코의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부정적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지면서 대우조선해양 주가가 급락하는 일도 있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포스코 지분 5%가량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포스코 측은 외인 주주들의 압력설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고 밝힌다. 올 초 정 회장이 워런 버핏과 만난 이후로 대화 내용과 관련된 이런저런 추측들이 시중에 퍼졌지만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최근 확정된) 대우인터내셔널 인수 등 돈 들어갈 일이 많기 때문에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기울일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금자산이 6조 원 정도 있긴 하지만 그중 절반 정도가 대우인터내셔널 인수 비용에 포함될 것이며 나머지는 자원개발 같은 해외투자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1월 14일 포럼에서 이동희 당시 포스코 사장이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추진하면서 그동안 충분한 준비를 했기 때문에 (대우인터내셔널과 함께) 두 매물을 인수하더라도 유동성에는 부담이 없다”고 밝힌 것과 전면 배치되는 내용이다.
이러한 포스코의 입장 변화에도 불구하고 포스코가 대우조선해양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을 것으로 보는 재계와 금융권에선 최근 정준양 회장의 발언을 ‘긴 호흡으로 가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오너가 없는’ 포스코에서 외인 주주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 회장이 일단 외인 주주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대우조선해양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포스코에 대한 호의적 태도 역시 정 회장이 좀 더 신중하게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으로 꼽힌다. 당초 산업은행은 올해 안에 대우조선해양 매각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정 회장의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발언이 전해지고 나서 산업은행은 올해 안에 대우조선해양 매각 공고를 내지 않기로 잠정 결정한 것으로 알려진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산업은행은 포스코 말고는 다른 (대우조선해양) 인수 후보를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며 포스코가 여건을 갖출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산업은행의 이 같은 행보가 오히려 포스코를 둘러싼 특혜 시비를 부를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포스코가 대우인터내셔널에 이어 채권은행과의 밀월설 속에 대우조선해양까지 인수하게 될 경우 포스코에 대한 몰아주기 의혹이 불거질 수도 있는 셈이다. 포스코가 지난 2000년 민영화됐지만 아직 공기업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는 평가 속에 각종 외압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도 정 회장의 M&A 행보를 좀 더 신중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정 회장이 일단 대우인터내셔널 조직을 어느 정도 안정시키고 나서 내년 초쯤 다시 대형 M&A 카드를 꺼내들 것으로 보기도 한다. 현재 대우인터내셔널의 임직원 급여나 영업이익률이 포스코 계열의 여러 회사들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초 포스틸 같은 포스코 계열사와 합병설이 나돌았다가 독립법인 체제 유지로 가닥이 잡혀가는 점도 포스코와 대우인터내셔널 간의 기업문화적 이질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대우인터내셔널을 기존 조직에 잘 융화시키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은 듯한 정 회장이 언제쯤 대우조선해양을 향한 마음을 다시 드러낼지 재계와 금융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