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에서 ‘여유’로…대인배 리더십 장착
▲ 아르헨티나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마라도나 감독과 벤치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허정무 감독. 이 경기에서 4 대 1로 패하자 외신들은 지도력 부재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
요르단과의 2010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한 뒤 가진 공식기자회견에서 허정무 감독은 “어느 시점이 되면 협회에 이운재 선수의 사면을 건의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론은 맹렬히 허 감독을 비난하며 그의 도덕성까지 논란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허 감독은 일정 부분 책임을 당시 기술위원장이었던 이영무 위원장에게 돌렸다.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
“감독 입장에서 이운재는 필요한 선수였다. 그 필요성을 당시 기술위원장이었던 이영무 위원장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솔직히 일이 그렇게 커질 줄 몰랐다. 이 위원장은 대표팀이 잘 되는 방향으로 그 문제를 풀어 나가려 했지만 부정적인 여론에 부딪히면서 곤란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내가 나서서 그 얘기는 없던 걸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 일 이후 이영무 위원장은 기술위원장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언론에선 ‘이운재 사면론 진실게임’이란 내용으로 허 감독과 이영무 위원장 사이에서 어떤 얘기가 오고갔는지 열띤 취재에 나서기도 했었다. 즉 허 감독은 이 위원장에게 단순히 ‘얘기’만 했을 뿐인데 이 위원장이 ‘나서서’ 상벌위원회를 열려다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결국 사퇴한 모양새였다. 당시 이 위원장과 인터뷰를 시도했던 한 기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영무 위원장은 그 일로 인해 굉장히 괴로워했었다. 기자들 앞에서 허정무 감독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지만 사실 허정무 감독이 이운재를 사면시켜달라고 얘기를 했었고 이 위원장은 상벌위원회를 열어 이운재를 사면시키려다 역풍을 맞은 셈이다. 이 위원장은 목사다. 그런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는 데 대해 크게 자책했었고 축구협회에선 허 감독에 대한 비난이 대단했었다. 자신이 이운재 사면을 요청했다고, 감독으로선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며 솔직히 인정하고 나섰더라면 기자들한테도, 축구인들한테도 책임을 지는 지도자로 비췄을 텐데 당시 허 감독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 그리스와의 월드컵 첫 경기에서 골이 터지자 허정무 감독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연합뉴스 |
“2000년 때도 가슴 아픈 경험을 한 바 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좋은 성적을 통해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 대한 비난이 홍수를 이뤘다. 아예 인터넷을 보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 너무 힘든 나머지 평소 존경하는 축구 원로를 찾아가 대표팀에서 물러나야 할 것 같다는 얘길 꺼냈다가 혼쭐이 났다. 그 따위 정신 자세로 어떻게 대표팀을 이끌어 가느냐며 화를 내셨다. 언론의 비난은 어떤 지도자라도 안고 가야하는 부분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다.”
허정무 감독은 그 축구 원로가 건네준 <리더와 보스>란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책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봤고 약해진 마듬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대표팀 언론담당관인 이원재 부장은 그 일 이후로 허정무 감독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물론 최종예선 2, 3차전의 경기 내용이 좋아지면서 허정무 감독에 대한 비난은 자연스럽게 소멸되었고 허 감독 또한 많은 부분에서 달라지려고 노력했었다. 특히 선수들을 대하는 태도와 선수단을 이끌어가는 부분에서 이전과 달리 여유 있는 시각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한때 기자들과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었지만 부단한 노력을 통해 어느 순간부터 기자들과도 편한 사이가 됐다.”
허정무 감독은 2009년 10월, 역대 최약체라고 평가를 받은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이 홍명보 감독의 남다른 리더십에 힘입어 청소년월드컵에서 18년 만에 8강 진출에 성공한 데 대해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2010년 1월 월드컵대표팀의 남아공 전지훈련에 동행했던 한 축구관계자는 이런 설명을 곁들인다.
“남아공 전지훈련 때 허정무 감독이 홍명보 감독 얘기를 꺼냈다. 청소년월드컵이 끝난 뒤 홍명보 감독이 숙소에 기자들을 초청해 비치발리볼을 하고 맥주를 마시며 허심탄회한 얘기를 주고받았던 부분을 거론하며 자신도 기자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겠다는 말을 했었다.”
실제로 허정무 감독은 하루 동안 14개 언론사와 릴레이 인터뷰를 가지며 자신의 축구 철학과 선수단 운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면서 언론의 양해와 이해를 구했고 기자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인간적인 면모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월드컵 기자단 간사 역할을 맡고 있는 연합뉴스 이동칠 기자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사마다 돌아가면서 기자들을 감독 집이 있는 방배동 서래마을 부근으로 불러선 술도 마시고 노래방에도 가는 등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선보였다. 지난 1월 남아공전지훈련 때에도 지금 대표팀이 묵고 있는 헌터스 레스트에 기자들을 불러 2시간 여 동안 티타임을 가졌는데 당시 공식석상에선 할 수 없는 얘기들을 거론해 오히려 기자들이 놀랄 정도였다. 그 자리에서 나온 얘기들은 기자들이 알아서 기사화하지 않았다. 그만큼 허 감독은 기자들을 믿었고 기자들도 그 이후론 허 감독의 지도력을 의심하거나 부정적인 기사를 쓰지 않았다.”
월드컵이 열리는 격전지, 남아공 입성 후 허정무 감독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훈련과 경기가 열릴 때를 제외하곤 항상 웃는 얼굴로 선수들과 기자들을 대했다. 한때 ‘허무축구’라고 비난받았던 그였지만 그는 오히려 그 비난을 가했던 언론과 친밀감을 유지하면서 월드컵을 맞이했다. 아르헨티나전에서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신을 제외하고는 허 감독의 지도력이나 전술 문제와 관련해서 비난 섞인 기사들이 거의 없었던 배경에는 이런 사연들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연합뉴스 이동칠 기자는 “외국인 감독들이 대세를 이뤘던 대표팀 감독 자리를 다시 맡으면서 허 감독 또한 부담을 많이 느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초반에는 중량감이 떨어져 흔들릴 수 있는 여지가 많았지만 허 감독의 노력으로 잘 극복해낸 것 같다”고 설명했다.
허정무 감독은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설령 16강에 진출한다고 해도 감독직에 연연해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월드컵 이후엔 잠시 휴식을 취하다 그동안 용인 축구센터에 보관 중이었던 각종 기념품들이 옮겨간 목포 국제축구센터를 돌보겠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목포 축구센터에는 허정무 기념 홀이 들어설 예정이다.
“월드컵이 끝나면 당분간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대표팀을 맡은 이후 너무 오랫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다. 항간엔 K리그 감독을 맡을 거라는 소문도 있지만 아무 생각없이 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앞으로 나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겠지만 월드컵 대표팀을 맡은 이후 최선을 다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쌍둥이 외손주들이 가장 보고 싶다는 허 감독은 2010남아공월드컵이 미련도 후회도 없는 월드컵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남아공 루스텐버그=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
확~달라진 허정무 감독
“휴식도 전술입니다”
허정무 감독은 월드컵을 앞두고 선수들한테 많은 휴식과 휴가를 준 부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확고히 밝혔다. 특히 남아공 입성 후에도 아예 훈련을 하지 않고 선수들을 쉬게 했던 날이 있어서 기자는 허 감독의 의중이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기자처럼 호기심을 나타내는 선수가 있다. 바로 전남 드래곤즈에서 허 감독과 사제지간으로 만났던 김남일이다.
“감독님이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선수들을 대하거나 관리하는 면에서 이전 전남에서 본 모습과 지금과는 큰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월드컵이 끝나면 감독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요. 선수들을 배려하고 가급적 많은 휴식을 취하게 하는 부분 등 제가 대표팀 들어와서 보고 느낀 점들을 직접 묻고 싶어요.”
주장 박지성도 허 감독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분명 이전과는 달라지셨어요. 선수들의 의견을 많이 받아들이시거든요. 무엇보다 저한테 많은 힘을 실어주시려고 하셨어요. 선수들과 관련된 문제는 모두 저한테 물어보신 뒤 결정하셨고 제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주셨어요.”
대표팀 언론담당관 이원재 부장도 선수들과 같은 생각을 밝혔다. 허 감독의 오픈 마인드가 선수단 분위기를 한층 밝고 긍정적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감독님이 변하시면서 일하는 사람들도 편해진 건 사실이에요. 선수들이 놀라워 할 정도니까요. 큰 대회를 앞두고 선수들에게 인자한 모습으로 다가가면서 정해성 코치한테는 자연스럽게 엄한 역할을 맡겼는데 그 점이 선수들한테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