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지를 달러로? 금융통도 당했다
▲ 블랙머니가 달러가 되는 과정을 시연하는 모습. |
국제범죄수사대 관계자는 “사기수법이 전문적인 데다 치밀해 수사기관이 아닌 이상 사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피해자들 역시 금융권 출신이 대부분으로 ‘알고도 속을 수밖에 없는 물귀신 작전’이라며 가해자들에 대해 혀를 내두르고 있다.
김 아무개 씨(60)는 10년 전 한 금융권 국영기업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23년 근속으로 일하며 집안의 가장으로 자녀들을 성실하게 키워 냈다고 자부하는 김 씨였다. 자녀들도 자신의 진로를 찾아 취업할 즈음이라 김 씨는 새로운 삶을 구상하며 개인 사업을 준비했다. 그러나 선뜻 새 사업에 뛰어들기에는 자금이나 정보가 부족했다. 김 씨는 우선 어느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정보를 모으기 위해 가까운 지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런 자리에서 피의자 박 아무개 씨(여)와의 ‘악연’이 시작됐다. 김 씨는 2006년 돈을 불릴 만한 사업 거리나 유망 사업을 물색하기 위해 한 지인의 주선으로 박 씨를 만나게 됐다.
박 씨는 김 씨에게 처음에 1000만 원 정도의 투자를 제안했다. 돈을 빌려주면 이자로 얼마를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박 씨는 김 씨가 투자한 건에 대해 2년 동안은 꼬박꼬박 약속을 지켰다. 원금은 물론 약속한 이자를 정해진 기일에 챙겨줬다. 그렇게 투자관계로 수차례 만나면서 두 사람의 신뢰관계는 두터워졌다.
박 씨는 김 씨를 만나는 자리에선 언제나 외제차를 타고 명품가방을 소지해 잘나가는 투자자라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관계가 돈독해지자 박 씨가 투자를 제안하는 금액도 자연스레 불어났다. 박 씨는 김 씨에게 “아파트 담보로 4억 원을 대출해주면 6억 2000만 원을 돌려줄 수 있다”는 솔깃한 제안으로 자신에게 투자할 것을 권유했다. 지난 2년 동안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박 씨였기에 김 씨는 믿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투자금이 억대로 바뀐 후부터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킬 것을 채근하자 박 씨는 “오랜 시간 계획한 일이 막바지에 왔다”며 김 씨를 안심시켰다. 그는 “지금 테러 자금을 국내에 들여오는 방법과 두바이에 있는 금을 시세보다 싸게 들여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김 씨에게 약속한 금액보다 더 많이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돼 자신은 이제 해외 관계자들을 만나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박씨는 이 자금을 ‘블랙머니’라는 수법을 통해 운반하면 관세를 안 내도 돼 이익이 남는다는 설명과 함께 ‘블랙머니’가 달러가 되는 과정을 시연해 메일로 보내기도 했다.
김 씨가 의심을 하자 박 씨는 “두바이에서 신문지 한 면 크기의 금덩이를 구했다”며 “운반비용을 투자하면 원금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사진을 찍어 김 씨에게 보내기도 했다.
또한 박 씨는 김 씨에게 메일을 보내 “몇 년 동안 끌며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마련한 금이 눈앞에 있는데 막상 운반할 돈이 부족해 눈물이 난다”며 “자신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고 하소연했다. 특히 박 씨는 운반에 드는 비용을 자세히 언급하면서 김 씨가 이 금액을 더 투자하면 여태껏 든 비용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종용했다. 결국 김 씨는 박 씨의 술수에 넘어가 최근까지 2억 원을 더 투자했고, 아직까지 한 푼의 돈도 돌려받지 못했다.
김 씨는 6억 원대의 금품을 갈취당하고서야 박 씨를 사기혐의로 고소했다.
그나마 김 씨는 피해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또 다른 피해자 B 씨의 경우는 아직도 ‘블랙머니’의 존재를 믿고 있다. 그는 “이제 투자가 막바지에 달했는데 지금 남의 사업을 망치려는 것이냐. 이 번 블랙머니는 가짜가 아니다”고 주장하며 경찰조사에 불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블랙머니’ 관련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관계자는 “가해자들은 분쟁지역의 상속금, 아프리카 모 부족의 비밀금고, 권좌에서 물러난 왕의 비자금 등 실체가 확인되기 어려운 돈을 가지고 피해자들을 속이고 있다”고 말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