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하이에나 ‘여의사 프로필’ 포착
경찰에 따르면 성 씨는 2004년 11월 온라인카페 모임에서 만난 의사 김 아무개 씨(여·40)에게 접근해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국정원 국장을 맡고 있다고 속였다. 자신의 신분을 속인 성 씨는 2005년 11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모두 70여 차례에 걸쳐 2억 6000만 원가량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성씨는 지방의 한 고교를 졸업하고 일정한 직업도 없이 지내왔으며 전과 7범인 것으로 드러났다. 돈에 눈이 멀어 4년 동안 감쪽같이 신분을 속여온 성 씨의 뻔뻔한 사기행각 속으로 들어가 봤다.
강남 소재의 한 병원에 의사로 재직 중인 김 씨는 지난 2004년 11월 솔로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한 인터넷 사이트를 찾았다. 자기소개란에 자신의 직업과 함께 프로필을 올리자 곧 한 남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을 국정원 간부라고 밝힌 성 씨였다. 그는 자신이 명문대 법대 출신으로 북한 비자금을 추적하는 국정원 국장이라고 소개했다.
성 씨는 계속해서 간간이 연락을 취하며 만남을 가졌고, 김 씨 역시 만남이 잦아질수록 말끔한 외모에 유머 감각까지 갖춘 성 씨에게 호감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김 씨는 성 씨를 만나는 동안 그가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성 씨가 완벽하게 알리바이를 꾸몄기 때문이다. 성 씨는 김 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주 서울대 캠퍼스 인근으로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자신이 서울대 캠퍼스 내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또 자신이 북한 비자금을 추적하는 업무를 맡고 있어 신분이 철저히 감춰져 있다고 귀띔해 김 씨의 의심을 피해갔다.
교제가 시작된 후 한 해 동안 성 씨는 다정한 연인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 씨는 “국가 중요 정책을 맡은 책임자다 보니 인적사항 노출이 우려돼 통장 하나 만들 수 없다”고 하소연하면서 김 씨에게 통장을 빌려 쓸 수 없냐고 부탁했다. 성 씨를 굳게 믿었던 김 씨는 자신의 통장을 빌려 주는 것은 물론 급기야는 자신의 월급통장을 맡기고 신용카드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성 씨의 요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교제기간이 길어질수록 그가 요구하는 금액도 불어났다. 성 씨는 “투자하고자 하는 사업이 있는데 타이밍을 놓치면 안된다”며 초기 투자금 명목으로 8000만 원을 빌려 쓰기도 했다. 그 후에도 거액이 오고 갔지만 김 씨는 여전히 성 씨를 의심할 수 없었다. 성 씨가 큰돈을 요구할 때마다 대가를 지불하며 자신을 믿도록 종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김 씨에게 “내 소유의 도곡동 땅 100평을 명의이전해 주겠다”며 법원으로부터 소유권을 인정받은 문서를 내밀기도 했다. 또 결혼을 약속하며 구체적인 신혼생활을 계획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하지만 결혼 약속 역시 더 많은 돈을 챙기기 위한 성 씨의 ‘덫’이었다.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빌라 명의를 이전해야 한다는 핑계로 다시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이런 방법으로 성 씨는 4년간의 교제기간 동안 모두 78차례에 거쳐 2억 6000만여 원을 김 씨에게서 받아 챙겼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기에 김 씨는 아낌없이 성 씨의 요구를 들어 줬지만 한 남자의 등장으로 곧 신혼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조직폭력배 남 아무개 씨(38)가 부하직원 5명을 데리고 김 씨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남 씨 등은 김 씨에게 “성 씨가 송파구 한 병원 건물의 감정 평가를 부풀려주겠다며 컨설팅업자로부터 3000만 원을 떼먹었다”며 “떼인 돈을 대신 내라”고 협박했다.
김 씨는 3000만 원을 빼앗긴 후 경찰에 곧바로 남 씨를 신고했다. 그런데 경찰조사에서 드러난 것은 남 씨가 아닌 성 씨의 실체였다.
남 씨와 성 씨의 관계에 대해 조사하던 경찰은 “성 씨는 명문대 출신도, 국정원 직원도 아닌 전과 7범”이라고 김 씨에게 확인시켜 줬다. 김 씨는 그때서야 자신이 성 씨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이미 그동안 건네 준 2억 6000만 원은 성 씨가 유흥비로 탕진한 후였다.
7월 1일 기자와 통화한 서울성북경찰서 강력계 한 관계자는 “김 씨는 자신을 속여 온 성 씨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원하지만 신분이 현직 의사다보니 자신의 피해사실이 알려질까봐 상당히 조심스러워 하고 있다”며 “현재 남 씨와 성 씨는 서울중앙지검에 송치된 상황이다”고 전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