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 깨부순 ‘흑인·여성’ 행보 관심집중…고령의 바이든 유고나 재선 포기 시 ‘최초 여성 대통령’ 기대감도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당선인이 11월 10일(현지시간)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에 앞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77)의 러닝메이트로 백악관에 입성하게 된 카멀라 해리스(56)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여성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이로써 세 번째 도전 만에 마침내 49대 부통령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안게 된 해리스는 당선이 확정되던 날 밤 환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첫 번째 여성 부통령이 될지는 몰라도 마지막은 아닐 것입니다.” 여성 부통령으로서 앞으로 해리스의 활약이 기대되는 가운데 고령인 바이든을 대신해 과연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도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역대 미 대선을 돌이켜 봤을 때 부통령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았던 적은 사실 없었다. 그 배경에는 해리스가 여성이란 점, 그리고 흑인이란 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70대 후반의 고령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바이든이 임기 중에 건강상의 문제로 위험에 처하거나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일 경우, 부통령인 해리스가 대통령직을 대신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해리스는 미 대선 역사상 이례적으로 주목받는 부통령 후보로 떠올랐으며, 만일 이런 상황이 실제 벌어진다면 비록 ‘선출된’ 대통령은 아니지만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기록될 전망이기도 하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고령의 바이든이 재선에 도전하지 않을 경우, 해리스가 부통령으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차기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일찌감치 낙점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지금까지 해리스의 정치 인생은 그야말로 장벽을 하나씩 깨부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도전과 투쟁이었다. 1964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출신인 해리스는 인도 이민자 출신의 어머니와 자메이카계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멀라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연꽃’이란 뜻이다. 어머니인 샤말라 고팔란은 카스트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 출신이었으며, 외할아버지는 인도 정부의 고위 관료였다.
1960년 미국으로 이민 온 고팔란은 유방암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아버지인 도널드 해리스는 스탠포드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해리스가 7세이던 1972년 이혼했다.
그 후 어머니 밑에서 자랐던 해리스는 어머니를 따라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주했으며, 어머니는 그곳에서 유대인 종합병원 연구직과 더불어 맥길대학의 교수직을 얻어 일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인도를 방문하기도 했던 해리스는 선거 운동을 하면서 종종 어머니에 대해 언급하곤 했었다. 한번은 “어머니는 우리 자매를 열심히 키워주셨고, 엄한 분이셨다”고 말하면서 “어머니는 152cm로 키가 작으셨지만, 만일 여러분이 어머니를 만나봤다면 아마 3m는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체구는 작았지만 크고 위대한 분이셨다는 의미였다.
해리스가 당선이 확정된 후 델라웨어주 월링턴에 모인 지지자들 앞에서 말했던 인상 깊은 메시지 역시 어머니가 어린 그에게 했던 말에서 따온 것이었다. 해리스의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카멀라, 앞으로 네가 많은 일을 처음 하게 될지는 몰라도 그게 마지막이 아니란 걸 기억하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11월 7일(현지시간) 부인 질 바이든 여사,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부부와 함께 델라웨어주 윌링턴에서 열린 당선 축하행사의 무대에 나린히 서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흑인 명문인 하워드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던 해리스는 졸업 후 캘리포니아주립대 헤이스팅스 로스쿨에 진학했으며, 졸업 후에는 알라메다 카운티 검찰청에서 부검사로 재직했다. 그의 정치 행보가 시작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2003년에는 캘리포니아주 최초의 흑인 여성으로서 샌프란시스코 지방 검사장직을 맡으면서 이름을 알렸고, 2010년에는 흑인 여성 최초로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 선거에 나가 당선되면서 또 한 번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의 도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016년에는 미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어 당선됐으며, 이로써 미 역사상 두 번째 흑인 여성 상원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2014년 49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 유대계 출신의 변호사인 더글러스 임호프와 결혼했으며, 현재 임호프가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1남 1녀를 키우고 있다. 해리스가 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임호프는 미국 최초의 ‘세컨드 젠틀맨’이 될 예정이다.
여성 정치인라면 늘 그렇듯 해리스의 패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뜨겁긴 마찬가지다. 아닌 게 아니라 당선이 확정되던 날 밤 소셜미디어에서는 해리스가 입고 나온 의상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날 밤 해리스가 선택한 의상은 흰색 바지 정장과 리본 블라우스였다. 이는 단순한 선택은 아니었다. 사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흰색은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해방과 여권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역사적으로 실제 많은 여성들이 통합과 해방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흰색을 활용해왔으며, 특히 많은 여성 정치인들은 중요한 자리에서 흰색 의상을 입고 등장함으로써 이런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대외에 알려왔다.
가령 2016년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 자리였던 필라델피아 전당대회에서 흰색 바지 정장을 입고 등장했으며, 미 역대 최연소 여성 하원의원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29)는 의회에 처음 입성하던 2019년 3월 개원식에서 흰색 정장을 입고 선서를 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선 1969년, 최초의 흑인 하원의원이었던 셜리 치솜 역시 흰옷을 입고 선서를 했으며, 1984년 월터 먼데일의 러닝메이트이자 미국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로 지명됐던 제럴딘 페라로 역시 흰색 옷을 입고 등장해 수락 연설을 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해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통령 당선이 확정되던 날 무대에 섰던 해리스는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인 웨스 고든이 디자인한 ‘캐롤리나 헤레라’의 흰색 바지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흰색 정장뿐만 아니라 리본 블라우스 역시 비슷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보통 전문직 여성이나 일하는 여성을 상징하는 리본 블라우스는 그간 여성들의 파워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여겨졌으며,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즐겨 입었던 스타일로도 유명했다.
이처럼 앞으로 미국인들은 부통령으로서 해리스가 보여줄 활약상과 더불어 그의 패션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실제 여성 정치인들이 딱히 반기는 바는 아니지만 패션은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메시지로 활용돼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가령 뉴질랜드 총리의 경우가 그랬다. 지난해 크라이스트처치 총격 테러 이후 재신다 아더 총리는 무슬림 공동체를 만나는 자리에서 화합과 용서의 의미로 히잡을 쓰고 나타나 찬사를 받았다. 보복과 원망 대신 그가 보여준 이런 화해의 제스처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비쳤다. 또한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의원은 성차별에 항의하는 의미로 항상 붉은색 립스틱을 바르고 의회에 출근하면서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캐주얼한 차림을 종종 선보이는 해리스는 특히 컨버스 운동화를 즐겨 신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든에게 당선 축하 전화를 거는 동영상 속에서도 그는 편안한 운동복 차림이었으며, 이를 통해 지지자들에게는 자신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소탈하다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미 당선이 확정되던 날 밤 해리스는 자신이 패션의 힘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충분히 알려주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