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고수·후원자 ‘삼위일체’
▲ 압구정 기원에서는 아마추어 고수들이 기원 자체 리그인 ‘전국 아마 최강자전’을 벌인다. |
압구정지원, 아니 압구정기원이 이채로운 것은 거기 드나드는 사람들, 기원의 풍경 때문이다. 아마 고수들의 얼굴이 많이 보인다. 그것도 보통 고수가 아니라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전국구’ 멤버들이다. 정인규 임동균 신병식 김동근 김동섭 박성균 심우섭 공한성 곽웅구 김정우…. 한국 아마추어 바둑을 대표하는 시니어 스타 군단으로 최고단인 7단이 수두룩하다. 이들이 여기서 리그전을 벌이고 있다. 현재 제3기가 진행 중이다. 올해 초, 제1기가 출범할 때는 11명이었던 것이 지금은 25명으로 늘어나 있다.
한사람이 24판을 소화하는 3개월 페넌트레이스이며, 우승상금 200만 원이다. 웬만한 아마추어 대회의 상금 수준이다. 준우승 130만 원, 3등 100만 원, 4등 70만 원, 5~10등은 60만 원부터 10만원씩 내려가 10등까지 시상한다. 상금총액 710만 원이다. 그리고 저격수당이라는 게 있다. 단어가 좀 살벌해 승리수당이라고 부르는데, 우승-준우승-3등 입상자에게 이긴 사람은 보너스를 받는다. 입상권 밖으로 밀려난 사람에게도 한 가닥 재미가 있는 것. 이번 7월로 세 번째 리그가 끝난다.
▲ 장시영 원장. |
장 씨는 전주가 고향으로 담배인삼공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신탄진, 광주 등지에서 근무했는데, 기획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해 기획통으로 불렸고, 그 시절 이미 바둑 고수였다. 근무지 일대의 바둑대회를 주름잡으며 이름을 날렸다. 전국대회 입상도 여러 번 했다.
담배인삼공사에서는 20년쯤 있었다. 계약 관계 등으로 바깥에서 일하는 시간도 많았다. 밖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만나고 일을 처리하는 업무가 적성에 맞았고, 안에서 일하는 것에 비해 시간의 융통성이 있었다. 그렇게 기획통으로, 바둑으로 잘 나가다가 어느 날 돌연 사표를 낸다. 담배인삼공사에 장 원장 선배가 있었다. 장 원장을 아끼고, 장 원장의 실력을 인정하던 그가 고위직으로 승진하면서 장 원장을 자기 옆에 두고 싶어 했다. 주변에서는 장 원장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장 원장은 거꾸로 사표를 내 버린 것.
“아니, 갑자기 내근직으로 발령을 내더라구요. 물론 자리는 좋은 자리였지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였어요. 그러나 나는 참 황당하더라구요. 바둑을 마음 놓고 못 두게 생긴 거예요. 외근하면서는 현지 퇴근도 많고 해서 바둑 두는 시간표를 짤 수가 있었는데, 내근을 하면 꼼짝마라 아닙니까. 바둑도 바둑이지만, 갑갑한 걸 못 견뎌요. 성격상 훨훨 날아다녀야지 안에 가만 앉아 있는 건 못 해요.”
압구정동에서 기원을 한 지 어느덧 20년이다. 지금 이 장소에서만 20년은 아니지만, 근처에서 왔다 갔다 했으니, 거기서 거기다. 한 동네에서 기원 20년, 그건 아마 기록일 거라고들 한다. 더구나 기원과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동네에서 말이다. 아마 고수들 말고도 단골손님이 많고, 단골손님의 대부분이 이른바 사회 저명인사다. 저명인사가 꼭 좋은 손님인 것은 아니지만 여기는 다르다. 단골손님 중 기업가 몇 사람이 압구정리그, 아니 전국 아마최강자전을 후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고수들의 진검승부를 눈앞에서 구경하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하냐는 것.
사실은 이게 요점이다. 후원이 없다면 800만 원쯤 되는 상금 총액을 자체 조달하기는 어려운 것. 몇 사람이 분담하니 후원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부담은 크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도 100만 원이라도 생색나지 않는 일에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압구정기원이 이색적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런 풍경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문화는 패트런이다.
“우리 기원은 뭐랄까, 아마 고수들에게는 요람이랄까, 안식처랄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프로기사들은 한국기원엘 가면 되지만, 아마기사들은 딱히 갈 데가 별로 없잖아요. 한국기원이 프로기사들의 직장이자 연구실이자 사랑방이자 휴게실인 것처럼 우리 기원은 말하자면 아마기사들의 한국기원인 셈이지요. 찾아와 주는 고수들이나 후원해 주는 분들이 다 고마워요. 좋은 직장 관두고 기원하는 거요? 후회 없어요.”
-기원이 사양길이라고 하는데요.
▲그러게요. 걱정은 됩니다.
-바둑도 사양길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요즘 컴퓨터 게임이다, 뭐다 요란하고 상대적으로 바둑이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치는 또 바뀝니다. 바둑이 예전처럼 대접을 받으며 영화를 누리는 날이 다시 꼭 올 겁니다. 그리고 젊은 강자들을 위한 리그를 하나 더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젊은이들 중에도 바둑 두는 친구들이 의외로 많고, 실력 센 친구들도 많습니다. 그들을 위한 마당이 없는 것뿐입니다. 바둑은 종합예술입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수 있게끔 유도해야지요.
지난 토요일 오후, 장대비가 쏟아져 별로 손님이 없을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기원문을 열고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오후 4시 무렵이 되자 빈자리가 없어졌다. 붉은 벽돌로 단단하게 지은 5층 건물의 4층. 홀에는 바둑판 20조. 창 쪽으로 특별대국실 혹은 지도기실, 그 옆에 휴게 공간. 입구 쪽에 카운터와 주방, 그 옆에 컴퓨터 2대가 있는 작은 방. 고수들은 리그전을 시작했고, 후원자, 패트런들은 구경을 시작했다.
이광구 바둑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