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영웅 5·16에 휘말려 망명
▲ 1953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이 제2군단 창설식에 참석, 군단장 장도영 소장에게 지휘장을 수여했다. 연합뉴스 |
장도영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신의주동중을 다녔다. 고향은 용천이다. 신의주동중 때는 육상선수로도 활약했고, 특히 ‘럭비선수 장도영’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곧이어 일본 도쿄로 유학, 동양(東洋)대학 2학년 때 일본의 시책이었던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파견, 훈련을 받고 견습사관이 되어 소위로 중국에서 종전을 맞았다. 전쟁 때는 아무도 자기 갈 길을 마음대로 못 정하는 법이다.
곧이어 만주를 거쳐 월남한 장 장군은 국군 창건의 뜻을 갖고 이응준 초대육군참모총장의 권유로 국군 장교로 임관, 5연대장 등을 거쳐 6·25전쟁 발발 시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맡았다. 6·25 발발 전에 북한군의 동향을 김백일 참모부장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곧 9사단 창설사단장이 된 장 장군은 이때 박정희 대령을 참모장으로 기용했다. 대전에서 9사단 창설을 준비하고 있는데 군우리 지방에서 중공군 협공을 받고 후퇴하던 6사단의 김종요 사단장이 자동차 사고로 후송됐다. 사단 지휘관에 공백이 생기자 장 장군은 직접 6사단장이 되어 군우리까지 찾아가 청색육각사단(Bluestar)을 지휘하고 후퇴작전을 도맡았다. 개성, 평양, 의정부를 거쳐 서울이 함락되자(1월 3일) 충북 진천에 사단사령부를 주둔시켰다.
이때 필자는 1951년 1월 4일 대구 육본을 출발, 대전과 천안에서 각 1박을 하고 피난민 행렬과는 반대로 진천 6사단 사령부에 부임했다. 눈이 녹아서 길이 질척거리는 오후였다. 이때 장도영 장군을 처음 보게 된 것이다. 필자는 곧 광혜원리에 있는 7연대(연대장 임부택)로 배속받았다. 이때 6사단에는 부사단장 송석하, 참모장 민병권, 정보참모 최택원, 작전참모 홍순용 조정연, 군수참모 황필주 등이 있었다. 곧 임부택 7연대장이 참모장으로 옮기고 필자도 따라서 6사단 작전처로 옮겼으나 임 참모장이 이내 부사단장이 되는 바람에 필자 역시 부사단장 부관이 되었다.
1951년 1월 25일에 용인, 이천, 여주 선에서 반격을 시작한 6사단은 가평에 사단 사령부를 두고 사창리까지 갔다가 중공군의 공격으로 밀려나 용문산까지 후퇴해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천막과 장비를 싣고 3시간 만에 청평 양수리를 거쳐 용문산까지 철수했다. 이때 6사단이 무너지는 바람에 측방의 미군부대까지 뚫릴 판이 되었고, 윌리엄 호그 9군단장의 무서운 질책이 있었다. 그러나 용문산(1157m)에서 장도영 사단장은 2, 7, 19연대로 하여금 사주방어를 하게 하여 전사(戰史)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다. 현재도 용문산 사주방어가 전술교본에 성공사례로 나온다. 한 봉우리에 하룻밤에 포탄이 4만 발씩 떨어질 때다.
▲ 장도영 장군(왼쪽)이 1951년 5월 29일 춘천에서 밴 플리트 8군사령관(가운데), 리지웨이 극동군사령관을 만나는 모습. |
용문산을 시작으로 한 화천저수지로의 진격작전에서 6사단은 중공군 2만 1550명을 사살하고 2617명의 포로를 잡았다. 용문산 전투는 사창리전투 실패 후 꼭 1개월이 지난 1951년 5월 17일에서 21일까지의 일이다. 곧이어 화천을 거쳐 금성까지 진출했으나 휴전회담으로 맥이 빠졌고 장 장군은 곧 예측에 없던 제주도 신병훈련소 소장으로 부임했다가 미국 육군참모대학에 유학을 갔다.
하지만 장 장군은 1953년에 귀국하자마자 휴전회담 서명 직전에 있는 중공군의 대공세를 막기 위해 5사단장, 8사단장, 2군단(군단장 정일권) 부군단장으로 전투를 지휘하다 정일권 군단장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자 2군단장을 맡게 되었다. 이후 필자는 1953년 3월에 미국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으로 도미유학, 귀국 후에는 양양 부근의 27사단 79연대 정보주임으로 부임했다.
27사단이 4각 사단을 시험하는 사단이 되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을 때 양양의 미국고문단 시설에 이한림 6군단장, 송요찬 3군단장, 장도영 2군단장들을 불러 브리핑을 한 적이 있다. 영어하는 보병장교가 드물 때라 필자가 차출되어 정보판단을 통역 없이 브리핑을 했다. 끝나고 강평을 할 때 이한림 군단장이 특히 S-2의 정보판단 브리핑이 좋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장도영 군단장은 유심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기동연습과 회의가 끝난 후 이형석 사단장이 필자를 불렀다. ‘6군단장 이한림 장군과 2군단장 장도영 장군이 전속부관으로 달라고 해서 동의했다. 6군단에 먼저 발령이 났지만 2군단으로 부임하고 명령은 거기서 정리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필자는 사단장이 내준 지프차로 화천까지 갔다. 여기서 장도영 장군과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된다.
필자는 6개월 후에 6군단(군단장 이한림)으로 나와 있는 명령이 취소가 되지 않아 6군단으로 부임하고 장 장군과는 떨어졌다. 그후 필자는 결혼을 하게 되어 육군참모차장이던 장도영 장군에게 축사를 부탁하러 갔더니 쾌히 승낙하고 당시 비 오는 일요일인데도 주례 이응준 체신 장관(초대 참모총장)과 함께 나와서 축사를 해주었다.
1961년 2월 17일 다시 최경록 장군에 이어 육군참모총장으로 온 장 장군은 필자에게 수석부관을 맡아달라고 주문하기도 했지만 필자는 정중히 사양했고 하우즈(Howze) 장군(후에 미8군사령관) 요청으로 KMAG 군사고문단장실로 옮겼다. 하지만 보직이 보직인 까닭에 자연히 육군참모총장실과의 연락 등으로 자주 장 장군을 접하곤 했다.
장도영 참모총장이 부임할 당시는 사회가 극도로 불안정하고 장면 정부는 아무 것도 못할 때였다. 심지어 군 장악도 못했을 때였다. 또 쿠데타 소문도 많이 돌고 있었다. 최경록 총장 때도 강문봉이 와서 1개 연대면 서울 점령이 가능하다며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을 필자가 직접 들은 바 있다.
장면 총리도 장 총장에게 박정희 그리고 족청계 등의 쿠데타 음모 정보가 있는데 알아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이에 장 총장은 “염려 말라”고 답을 했다 한다. 그러나 5·16이 터졌고, 장도영 참모총장은 매그루더 8군 사령관과 하우즈 군사고문단장의 병력동원을 통한 강력진압 주장과 박정희 소장의 혁명군 지휘 요청 틈에서 동분서주하면서 유혈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이어 최고회의 의장직을 수락, 출동부대의 원대복귀도 명령하고 출동진압군도 준비시키면서 박 소장,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를 만나 수습도 간청했다. 무엇보다도 무력진압을 원하던 매그루더 8군 사령관을 만류해 유혈충돌도 피하게 했다. 특히 여순반란 때 2개 대대를 진압하는 데 소요된 시간과 부대병력 등의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매그루더 사령관을 설득했고, ‘혁명주체가 좌경이 아닌가’ 하고 8군이 의심하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장 장군은 결국 장면 내각이 임명한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위치에서 오는 모순을 극복하고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결심하여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직을 수락했다. 그 바람에 전전긍긍하던 군사혁명 주체는 마음 놓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적극적 반대나 찬성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여 사실상 군사정변을 방조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후 비상조치법도 심의 없이 일방적으로 공포되고 장관도 민간인은 배제하고 군인으로 채워졌다. 결국 박치옥 등 5기생 출동부대와 8기생 주체 간에 알력이 생기고 장도영 내각수반은 거세됐다. 이때 장도영 계열 40명도 구금되었다. 하루는 미국 지상군사령관(중장)으로 영전하게 된 하우즈 고문단장이 작별예방을 하기로 되었는데 아침에 사정이 있어 취소한다고 연락이 왔다. 장 장군이 원효로 자택에 연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장 장군은 곧 구금되고 군사재판에서 반혁명으로 종신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62년 형면제되어 미시간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장도영 장군은 참모총장으로서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쿠데타가 일어난 뒤에도 이유가 어찌 되었든 진압하지 않았다. 사태수습과 원상복귀도 실패했다. 장도영 장군은 겸허하게 국민의 단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6개월간의 구금생활에서 한 번도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장도영은 곧 미시간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웨스턴미시간대학에서 70세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후학을 육성했다. 훌륭한 것은 그 후 한 번도 정권이나 한국을 비판한 일이 없다는 점이다. 부인 백형숙 여사와 함께 어렵지만 새로운 인생을 성공한 것이다. 그는 1968년에 서울을 방문,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는데 결국 귀국권고도 거절하고 한반도와 극동의 안전보장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계속했다.
장 장군 내외는 2001년 필자가 국회에 있을 때 다시 서울에 왔다. 필자와 내자는 장동운 내외(원호처장), 최영춘 내외(한독산업 사장) 등 6사단에 있던 사람들을 초청해서 저녁대접을 했다. 화제는 6사단 때의 중부전선 혈투와 한국의 안보문제였다. 제일 걱정거리는 미군의 철수와 방어선 후퇴였다. 6·25 때 그은 리지웨에(Ridgeway)선 말이다. 필자가 노무현 정권 때 곤욕을 치르고 나온 직후 장도영 장군의 부인 백형숙 여사로부터 서한이 왔다. 서울에 와서 소식을 듣고 장 장군이 무척 걱정을 했는데 이제 끝났다니 다행이라는 위로 편지였다. 장도영 장군을 생각하면 늘 전투복 차림의 청년 장군이 산야를 힘차게 달리며 부대를 지휘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늘 나라를 위해 싸우고 생각하며 충성하는 ‘노병’ 장도영 장군의 건강을 기원한다.
전 IOC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