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의 ‘반말 훈련’ 우린 그 전부터 해와”
▲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후련할 것 같다. U-20 월드컵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돌아온 소감이 어떤가?
▲모든 걸 다 털어버린 느낌, 내 몸 안에 있던 뭔가 다 빠져나간 그런 느낌이 든다. 한국에 돌아와 공항 입국장에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여 환영해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선수들 역시 매우 놀랐다고 하더라. 그제야 ‘아, 내가 뭔가 하고 돌아왔구나’란 실감이 났다. 2008년 8월 25일, 선수들을 소집한 이후로 꼭 3년이 지났다. 월드컵 체제로 준비를 시작한 건 올해 2월 가평에서였는데, 준비 과정에서 선수들과 함께했던, 때론 힘들고 때론 즐거웠던 순간들이 스쳐지나간다. 선수들도 그리고 감독인 나도 많은 공부가 됐던 대회였다.
―독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떤 생각을 했나. 분명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갈 때는 대회, 그리고 예선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내가 혹시 놓친 부분은 없는지 상대팀 비디오를 보고 또 보며 체크하느라 정신없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선 세계적인 선수들과의 실력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더 높은 레벨로 올라가기 위해 앞으로 어떤 준비가 필요할지 고민했다.
―최 감독이 지도자가 되기 이전의 축구 인생 스토리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정말 까마득한 옛날 얘기다(웃음). 나조차 이렇게 떠올려 보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축구를 처음 시작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다. 그러고 보니 13세에 시작했으니 올해로 꼭 27년이 됐다. 축구가 재밌었고, 또 주변에서 재능이 있다며 ‘넌 축구를 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어머니는 찬성을 하셨지만, 아버지 반대가 심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아버지 몰래 축구를 배웠다. 그래서 시험 기간에 밤새워 공부해 90점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곤 했다. 중3 때 자연스레 아버지가 알게 됐는데 그땐 말리기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웃음).
―선수 생활을 비교적 일찍 접게 됐는데,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건가.
▲축구가 싫어서 떠난 건 아니었다. 선수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그러나 축구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대학 졸업 후 프로 팀에 들어가기 위해 계속 운동을 했다. 몸이 어느 정도 만들어졌을 무렵 교통사고가 났다. 차가 폐차될 정도니 2주 넘게 온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남들보다 지도자 생활을 일찍 시작할 수 있었고, 그때의 시련이 나를 더 단련시켰다고 생각한다. 신기하게 유상철 선수를 제외하고 90 동기들 대부분이 일찍 선수 생활을 접었다. 정말 재능이 많고 잘했던 친구들인데. 지금까지도 자주 모여 밤새 축구 얘기를 하곤 한다.
―여자 축구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2000년에 동명초등학교가 서울에서 최초로 여자 축구부를 창단했다. 당시 여자 교장선생님께서 축구를 굉장히 좋아하셔서 의욕적으로 추진한 결과였다. 일주일에 두 번 발야구, 피구, 미니게임을 하면서 서서히 축구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하나 둘 학원을 그만두더라. 나중엔 정식 축구부인 것을 알고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반대를 하는 바람에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여자 축구에 새로운 전술을 시도해본 것이 있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여자 축구에서 지역방어, 일자수비는 불가능한 전술이란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난 여자 축구에서도 포백 시스템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공간 개념을 심어주고 4-4-2, 4-3-3 전술까지 시도했다. 덕분에 오주중학교 감독 시절 전국체전, 추계대회, 퀸스컵까지 3관왕을 차지하는 등 뛰는 경기마다 5대0, 6대0으로 승리를 거뒀다.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의 ‘존칭 생략 전술’이 화제가 됐었는데, 우린 훨씬 이전부터 시도해왔다. 커뮤니케이션도 전술이다. ‘언니, 여기요’ 하는 사이에 공은 이미 지나가버린다. 운동장에 들어가면 ‘야, 여기, 가’ 등 짧고 의사 전달이 쉬운 용어를 쓰도록 했다. 선후배 사이에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고, 부드럽고 친근한 팀 분위기를 유지케 했다.
―동명초, 오주중, 동산정보고를 거치며 U-20 대표팀 주축인 지소연, 김나래, 문소리 등 걸출한 스타들과 8년을 함께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선수들에게 용돈을 주고 필요한 용품도 사주며 아버지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지도자가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재능이 있는 선수의 어려운 가정 형편을 알고 나서지 않을 감독이 어디 있겠나. 가정 형편은 내가 도와줄 수 있지만, 부상 때문에 축구를 그만둔 제자들이 생길 때 정말 가슴이 아팠다. 내 첫 제자가 십자인대를 다쳐 축구를 못하게 됐다. 알고 보니 다른 선수들 대부분이 이미 연골, 십자인대를 다친 상태더라. 그때야 비로소 성장기 여자아이들이 골반이 벌어지고 무릎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운동할 때 연골, 십자인대를 많이 다치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어떻게 하면 선수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고 운동할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다. 그래서 끈, 고무, 파이프 등을 사서 학부모님과 사다리, 폴대 등 모든 축구 장비를 직접 만들었다. 근력을 키우고 밸런스를 잡아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외국에서 1개당 18만 원 하던 장비를 1만 8000원에 10개를 만들었으니 주위에서 다들 놀라워하더라.
―여자 아이들이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해 다가가기 어려웠을 것 같다.
▲고민을 꽁꽁 숨기고 마음을 열지 않는 통에 애를 많이 먹었다. 그래서 대화를 많이 시도했다. 포지션끼리 묶어 축구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개인적으로 선수들의 상담을 들어주면서 소통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오주중 감독 시절에 아이들이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 하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놀란 적이 있다. 운동장에 들어갈 때 휴대폰을 모두 반납하게 했는데, 아이들이 문구점에 휴대폰을 맡겨 놓고 몰래 나가서 전화하고 들어오더라. 몇 번을 눈감아 줬지만 아이들이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계속 거짓말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안 되겠단 생각이 들어 선수들 휴대폰을 부순 적이 있다.
▲ 20세 이하 여자월드컵 대표팀이 지난 4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왼쪽부터 문소리, 김혜리, 최인철 감독, 지소연, 김나래. |
▲2002년에 결혼해 벌써 세 아이의 아빠가 됐다. 묵묵히 힘이 돼주는 아내에게 항상 감사하다. 결혼 전에 ‘난 집에 자주 못 들어가는 직업을 갖고 있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선포를 했었다. 나중에 ‘정말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 줄 몰랐다’고 이야기 하더라. 실제로 1월 27일이 결혼식인데 동계훈련이 끝난 25일에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 상황을 잘 이해하고 도와주는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다.
―월드컵 얘기로 돌아가 보자. 만약 U-20 월드컵에서 뛰었던 다른 팀 선수들 중 한 명을 데려올 수 있다면 누굴 꼽고 싶나?
▲나에겐 우리 선수들이 최고다. 누굴 데려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우리 선수들을 지도해 그 선수 이상으로 만들면 되니까. 비록 독일 포프가 득점왕에 올랐지만 16개국 통틀어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지)소연이었다. 스피드, 드리블 능력, 골 결정력 등 소연이를 능가하는 선수는 없었다.
―미국, 일본에서 이미 지소연에게 러브콜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소연이와 한국 축구를 위해 외국 진출은 필요하다. 시장이 크고 좋은 선수가 많은 미국을 추천해주고 싶다. 문화 차이를 극복하고 더 큰 선수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대표팀 ‘팀 송(team song)’을 직접 선곡했다고 들었는데.
▲주로 퀸(Queen)의 음악을 선택한다. 여왕이 되라는 뜻에서(웃음). 지난해엔 퀸의 ‘I was born to love you(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요)’를 선택했다. 아이들에게 ‘너희는 축구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며 선곡 이유를 말해줬다. 이번 월드컵 땐 퀸의 ‘Don’t stop me now’를 선곡했다. ‘너희들이 사랑하는 축구를 이 시간 즐겨라. 멈추지 말고 뛰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광래호 1기 명단이 발표됐다. 만약 최 감독이 남자 축구대표팀 감독이라면 어떤 라인업을 구성하겠나?
▲(겸연쩍은 미소를 보이며)남자 쪽은 생각해보질 않았다. 만약 라인업을 구성한다면 (이)근호, (박)주영이 밑에 (박)지성이, (이)청용이, (김)정우, (기)성용일 두고 (이)영표, (곽)태휘를 세우겠다. 여기에 황재원, 오범석을 가미하면 어떨까. 두 선수 모두 굉장히 영리하고 수비력도 좋은데 실수로 인해 저평가된 부분이 있어 안타깝다. 골키퍼엔 (정)성룡,(김)영광이를 쓰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고생한 U-20 대표팀 선수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물음에 최 감독은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천천히 그러나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너희 21명 모두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진짜, 진짜 딸들이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
오주중 최현우 부장이 말하는 ‘최인철’
“끊임없는 공부 따라갈 자 없어”
“최 감독은 뭔가 달랐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세, 그리고 선수들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최 감독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최현우 부장은 오주중학교에서 여자 축구부를 창단한 2001년, 최인철 감독을 동명초에서 스카우트해 왔다. 대회만 나가면 5대0, 6대0으로 지던 선수들을 최 감독과 함께 갈고 닦아 2년 만에 전국 최강 팀으로 만들어냈다. 최 부장은 오주중 여자 축구부의 모든 것을 지켜본 산증인인 셈. 외국 서적, 비디오를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밤새며 연구하는 최 감독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큰일 한번 내겠구나’란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그만큼 ‘공부벌레’란 표현이 꼭 들어맞는 최 감독이었다고. 선수들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단다.
“당시 축구부 감독 월급이 얼마나 됐겠나. 정말 푼돈이었다. 최 감독이 본인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선수들 챙기느라 항상 적자였다.”
최 감독의 러브 스토리에 대해서도 살짝 언급했다. “결혼 전 아내 분이 학교로 자주 찾아왔었다. 자주 만나지 못했던 걸로 안다. 저녁 연습 끝나고 운동장에서 데이트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최 감독을 잘 배려해주고 이해심 넓은 미인이란 소문이 자자했다.”
최 부장은 “FIFA 주관 대회에서 ‘3강 신화’를 이뤘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최 감독은 앞으로도 한국 여자 축구의 또 다른 역사를 계속 써내려갈 것이다”며 후배의 밝은 미래를 기원했다.
“끊임없는 공부 따라갈 자 없어”
“최 감독은 뭔가 달랐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세, 그리고 선수들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최 감독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최현우 부장은 오주중학교에서 여자 축구부를 창단한 2001년, 최인철 감독을 동명초에서 스카우트해 왔다. 대회만 나가면 5대0, 6대0으로 지던 선수들을 최 감독과 함께 갈고 닦아 2년 만에 전국 최강 팀으로 만들어냈다. 최 부장은 오주중 여자 축구부의 모든 것을 지켜본 산증인인 셈. 외국 서적, 비디오를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밤새며 연구하는 최 감독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큰일 한번 내겠구나’란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그만큼 ‘공부벌레’란 표현이 꼭 들어맞는 최 감독이었다고. 선수들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단다.
“당시 축구부 감독 월급이 얼마나 됐겠나. 정말 푼돈이었다. 최 감독이 본인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선수들 챙기느라 항상 적자였다.”
최 감독의 러브 스토리에 대해서도 살짝 언급했다. “결혼 전 아내 분이 학교로 자주 찾아왔었다. 자주 만나지 못했던 걸로 안다. 저녁 연습 끝나고 운동장에서 데이트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최 감독을 잘 배려해주고 이해심 넓은 미인이란 소문이 자자했다.”
최 부장은 “FIFA 주관 대회에서 ‘3강 신화’를 이뤘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최 감독은 앞으로도 한국 여자 축구의 또 다른 역사를 계속 써내려갈 것이다”며 후배의 밝은 미래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