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KBS 다큐멘터리 3일
2020년 개항 100주년을 맞은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항. 구룡포 특산물인 대게와 오징어로 이곳의 겨울은 그 어느 곳보다 뜨겁다.
대게 금어기가 끝나는 12월이면 본격적인 겨울 조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구룡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과메기, 오징어도 제철을 맞는다.
구룡포항 어민들은 추운 겨울 몸 녹일 틈도 없이 거친 바다로 향한다.
구룡포항 포구에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제 속은 살필 줄 모르고 살아온 여인들이 있다.
과거부터 ‘여자가 배를 타면 운수가 나쁘다’는 미신 탓에 바다는 금녀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구룡포 여성들은 그 벽을 허물었다.
비록 배는 타지 못하지만 거친 포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삶을 바다에 던졌다. 폐그물을 손질하고 해녀로 물질을 하며 어판장 난전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왔다.
뭍과 물의 경계인 포구 더는 밀려날 곳도 없는 육지의 끝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며 살아온 사람들. 혹한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구룡포 여인들의 인생 이야기를 담았다.
구룡포항 위판장은 동이 트기 전부터 떠들썩하다. 경매사의 ‘땡’ 소리와 함께 경매가 시작되면 남들보다 싼 가격에 물건을 확보하려는 중매인들의 치열한 눈치 싸움이 펼쳐진다.
남성 중매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여성 중매인 208번. 구룡포의 중매인들은 본인의 번호가 새겨진 조끼를 입고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린다.
누군가의 엄마, 딸로도 모자라 중매인 ‘208번’으로 불리는 것이 속상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일할 수 있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한다.
‘억척스러움’으로 자식들을 키워내고 ‘부지런함’이라는 무기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녀들. 포구의 고된 일상을 버틸 수 있었던 건 함께 일하는 다른 중매인들 덕분이다.
때로는 치열한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어려운 순간에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이다.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이 있다. 해녀의 물질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일컫는 말이다. 혹한의 바다에 뛰어 들어 바위 사이를 헤집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이 끝났다고 해녀들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4시간의 물질이 끝나면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손질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구룡포리 어촌계에 소속된 해녀는 약 30여 명. 바다와 육지를 오가며 그야말로 숨 쉴 틈 없이 일해온 그녀들.
어느새 곱디곱던 소녀의 손은 어느새 주름진 손으로 변했다. 그러나 해녀들은 그 손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다.
바다를 직장 삼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은 이들이 쌓아온 시간이자 자부심이다. 다시 들여다본 해녀의 손에는 푸른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맞은 오징어가 맛을 내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매일 아침 위판장에서 산 오징어를 끌고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아픈 남편 몫까지 하루 1000마리의 오징어를 나르다 보면 몇 번이고 멈춰 서게 된다.
하지만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오징어가 마르기 전에 손질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정금자 씨(73)는 “지금이라도 벌어서 자식들한테 못 해줬던 걸 해주고 싶고 그래”라고 말한다.
일흔이 넘는 나이. 어느덧 5남매 모두 출가해 제 갈 길 가고 있지만 부부는 여전히 오징어를 말린다.
그들이 일하는 이유는 오직 자식들 때문이다. 남의 밭에서 일해가며 남부럽지 않게 키웠건만 아직도 못 해준 것들만 생각난다.
포구의 바람을 벗 삼아 평생 오징어를 말려왔지만, 노모의 자식 사랑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포항 구룡포항에서 거친 포구, 파도와 바람을 이겨낸 여인들을 만났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