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품인 ‘폴로’는 말을 타고 폴로(운동경기)를 즐기는 모양의 마크가 찍혀 있다. 이 상품은 미국 내에서도 비교적 고가에 속한다. 리바이스가 미국의 대중 블루데님(세칭 청바지)의 대명사라면 폴로는 그보다는 한 단계 높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폴로의 국내 수입업자는 I사다. I사는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인 D그룹 오너의 외사촌인 L씨가 경영하고 있다. 90년대 중반부터 L씨는 폴로의 브랜드를 도입, 일부는 OEM(주문자 상표부착방식)으로 생산하고 또 일부 제품은 직접 수입해 팔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폴로는 국내에 들어온 다른 수입 의류보다 많은 인기와 판매실적을 올리고 있다. 폴로 제품의 국내 수입에 얽힌 비화를 더듬어보자.
폴로 제품이 국내에 처음 수입된 것은 정확히 88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당시 이 상품을 처음 수입한 사람은 허병구씨였다. 그는 신한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를 경영(이 회사의 회장)하고 있었다.
그는 올림픽을 앞두고 국내로 수입상품들이 물밀듯이 몰려오는 틈을 타고 미국에서 인기가 높던 폴로를 수입하기로 했다. 그는 80년대 초반 국내시장에 등장해 대박이 터진 ‘나이키’ 신발과 같은 신화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수입은 했지만 폴로 제품은 처음에 그리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러자 허씨는 프랑스 대중 의류 브랜드인 세비뇽이란 상품도 함께 수입했다. 그러나 두 제품 모두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 이유는 우선 두 제품의 인지도가 낮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가격이 비싼 편인 데다가 백화점 등 고급 유통루트를 뚫지 못한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허씨는 은행에서 수백억원을 차입해 신촌역 부근에 10층짜리 대형 자체 매장을 세웠다. 당시로선 첨단 디자인으로 건축된 이 빌딩은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노력도 폴로나 세비뇽의 매출신장에는 크게 기여하진 못했다.
갑자기 폴로 얘기를 꺼낸 것은 바로 이 제품을 수입한 허씨에 대한 스토리를 말하기 위해서다.
허씨는 지금이야 잊혀진 경제계 인사이지만 90년대 초반만 해도 재계에서 떠오르는 새 별로 각광을 받았다. 급속한 사업확장과 막강한 재력을 가진 인사로 알려졌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허씨의 이 같은 외양은 허상이었다. 은행빚과 막대한 차입으로 속으로 곪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YS정부가 들어선 직후 회사를 갑자기 부도내고 미국으로 도피해 버렸다. 그런데 그가 미국으로 도피한 뒤 숨겨져 있던 그의 사생활과 회사의 속사정이 드러나면서 적잖은 파문이 일었다.
1944년생인 허씨는 폴로를 수입할 당시 40대 후반 나이였다. 그는 일찍부터 사업에 뛰어들어 삼라통상, 천보인터내셔널, 에스에이치유통 등 여러 개의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폴로와 세비뇽을 수입하기 위해 신한인터내셔널을 설립했고, 나중에는 다른 계열사를 모두 정리해 법인을 신한인터내셔널로 통합했다.
재미있는 것은 신한이라는 회사의 임원진이었다. 이 회사의 등기임원은 모두 5명이었는데, 핵심 임원이던 K씨를 비롯해 대부분 허씨의 K고 후배였다. 이 회사의 또다른 K아무개 임원은 허씨 부인의 친동생이었다.
사실 어떤 면에서 허씨는 국내 유통시장에 새로운 형태의 판매기법을 소개한 유능한 인물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상품권 제도를 처음 실시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에서 수입하는 제품의 매출액을 올리기 위해 국내 최초로 상품권이라는 신종 유가증권을 자체 발행하기도 했다. 당시로선 상품권에 대한 개념이나 법 체계가 정착되어 있지 않은 탓에 정부(재무부)도 허씨가 요청한 자체 상품권 발행에 대해 특별한 규제를 가하지 못했다. 이것이 나중에 백화점 상품권 발행제도로 발전했고, 현재 시중에서 유통되는 각종 유사 상품권으로 번져나갔다.
사실 당시 그가 상품권 발행을 한 것은 매출증대를 위한 목적과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차입금을 줄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상품권을 할인된 가격으로 판 뒤 미리 현금을 확보해 부채를 갚으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문제가 됐지만 그는 초기에 상품권 발행을 남발해 회사가 부도난 뒤 많은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어쨌든 신한인터내셔널은 90년대 초반만 해도 잘나가는 기업 중 하나였다. 신촌 매장을 비롯해 서울에만 5~6군데의 대형 매장을 가지고 있었고, 매출도 1천억원대를 오르내릴 만큼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그러던 그가 침몰하기 시작한 것은 92년 무렵이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내부적으론 과도한 차입에 따른 금융이자 부담으로 서서히 곪아들어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러하듯 당시 신한인터내셔널의 몰락이 급속하게 이루어진 배경에는 내부단속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점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일부 임직원들은 회사가 잘나갈 때 몰래 회사재산을 빼돌려 한살림 차리기도 했다. 예를 들면 회사의 부동산을 개인명의로 바꿔치기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으로 치닫게 된 원인 제공자는 허씨였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시각이었다. 실제로 당시 재계에서는 신한의 몰락은 허씨의 사생활에서 비롯됐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허씨는 80년대 후반 최고 인기 연예인이던 H양과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H양은 허씨와의 스캔들이 터질 무렵 유명 패션업체인 E사의 오너 2세 L씨와 결혼한 상태였으나 1년도 안돼 이혼설이 나돌고 있었다.
당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소문으로 허씨의 부인이 노발대발해 재산을 모두 자신 명의로 돌려놓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자 허씨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회사 재산을 친분이 있는 여러 사람에게 위장분산하는 등 서로 재산 빼돌리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오너 일가족이 이런 행태를 보이고 있었으니 임원들이야 오죽했을까.
어쨌든 신한인터내셔널이 부도난 뒤 뒤늦게 검찰에서 회사 장부를 압수하는 등 수사에 나섰지만 이미 허씨를 비롯한 임원 등 핵심 관계자들은 모두 미국으로 줄행랑을 친 뒤였다. 수천억원의 자금을 금융기관에서 차입한 과정도 핵심 경영인이 모두 사라졌으니 속시원하게 드러날 리 없었다. 이 여파로 당시 이 회사의 주거래은행이던 H은행의 핵심 임원이 사표를 썼다. 하지만 사라진 천억원대의 대출은 끝내 환수하지 못했다. 나중에 이 회사에 돈을 대출해준 H은행은 다른 은행과 합병했고, 수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어야 했다.
끝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90년 초반 당시 H은행에서 신한인터내셔널에 빌려주었던 대출 장부가 아직도 남아 있을까 하는 부분이다. 허씨 등에 대한 공소시효도 얼마 남지 않아 관심을 모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선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