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입법 마련 안돼 의료현장 혼란 예고…가이드라인도 없어 적절한 서비스 못받을 수도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처벌하도록 한 형법 조항에 불합치를 선고한 지 1년 8개월이 흘렀지만 국회는 아직 이를 보완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 사진=일요신문DB
헌법재판소(헌재)는 2019년 4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형법 제269조(자기낙태죄)와 제270조(의사낙태죄)가 여성의 자기 결정을 침해한다는 판단이다. 헌재가 정한 법 개정 시한은 2020년 12월 31일. 국회는 법 공백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그 안에 낙태죄 관련 법을 개정해야만 했다. 정부와 일부 국회의원들이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여야 정쟁으로 정기국회가 파행된 탓에 논의에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사상 초유의 입법공백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
낙태죄가 폐지되면 임신중지는 더 이상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대체입법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신중지는 합법도 아니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불가피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도 최소한의 보건 의료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지역 보건소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상담 등을 지원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고위험 임산부 등 관리가 취약한 이들에 대해 임신‧출산 의료비를 제공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들이나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이 불가피하게 임신중지를 해야 할 경우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개정안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의 임신중지는 공공보건 차원에서 보장받지 못한다.
아직 ‘의사 거부권’에 대한 법적 근거도 없는 탓에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이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의료계는 임신중지와 관련해 의료행위 거부권 보장을 요구하고 나섰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지난 12월 28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태아를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낙태해달라는 요청을 의사가 양심과 직업윤리에 따라 거부하는 것은 ‘정당한 사유’에 해당되며 누구도 의사에게 양심에 반하는 진료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2019년 4월 낙태죄 처벌 위헌 여부를 밝히는 헌법재판소 재판관들. 사진=일요신문DB
관련법 개정을 소홀히 한 국회와 별개로 정부에 대한 아쉬움도 나온다. 입법 공백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예견된 만큼 정부 차원에서 가이드라인이나 규정을 마련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보건복지부 측은 “수술 가이드라인과 상담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지만 준비 단계일 뿐이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나영 위원장은 “법적 규제가 아니더라도 의료적인 정책 조치나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어야 했다”며 “세부적인 규제 가이드가 아니라 취약 계층에 어떤 지원이 더 필요한지, 병원마다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법안이 폐지되기 전에 마무리해야 했다”고 말했다.
다만, ‘미프진’과 같은 자연 유산 유도약 도입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낙태가 불법인 탓에 수요자들은 음성적인 방법으로 약물을 유통‧거래해 왔지만 국회의 개정법 마련 여부와 상관없이 약물 도입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는 “그동안 임신중단은 형법에서 ‘낙태죄’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법이었고, 먹는 낙태약은 범죄를 방조하는 꼴이기 때문에 허가되지 않았던 것”이라며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불합치 결정에 따라 임신중단은 더 이상 범죄가 아닌 게 되고, 약사법도 약물을 제한할 근거가 없어진다”고 설명했다.
현재까지는 식약처에 제약사들의 자연 유산 유도약 허가신청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완제의약품의 허가심사 처리 기간이 보통 3개월, 길게는 6개월을 넘어서기도 한다는 점에서 국내에는 하반기는 돼야 자연 유산 유도약이 유통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회는 입법 공백 장기화를 막기 위해 안전한 임신 중지에 대한 개정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간사인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논란이 너무 큰 법이기 때문에 속도를 내서 처리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며 “2021년 1월 중에 전체회의와 본회의를 열어 개정안을 통과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