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터놓고 선처 호소’ 카드 꺼낼까
여러 진행 상황을 종합해볼 때 이제 수사의 칼끝은 한화그룹 오너 일가로 향하고 있다. 검찰 내부에서는 김승연 회장의 소환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반면 한화 측은 이번 수사로 다시 김 회장이 검찰 포토라인에 서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한화그룹 비자금 수사의 막후를 들춰봤다.
한화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서부지검(지검장 남기춘)은 지난 9월 16일 한화그룹 본사 압수수색에 이어 28일에는 차명계좌 조성에 연루된 한화 전·현직 임원 10여 명을 출국금지 조치했다. 그리고 30일에는 한화그룹의 위장계열사로 의심되는 업체를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출금 조치를 취한 전·현직 임직원을 조만간 소환조사할 예정이다. 검찰은 결국 이번 수사의 최종 타깃이라 할 수 있는 김승연 회장을 조사하기 위한 수순을 차례로 밟아 나가고 있는 셈이다.
현재 검찰에서 그리고 있는 한화그룹 비자금 수사의 밑그림은 이렇다. 한화그룹이 계열사인 한화증권에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 50여 개를 개설하고 각 계좌마다 수억 원씩, 총 100억 원을 넣어놓고 주식투자를 통해 이를 300억 원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한화 측은 이에 대해 고 김종희 선대회장이 김승연 회장에게 물려준 재산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검찰의 판단은 다르다. 검찰은 이 돈이 차명재산이라 하더라도 차명으로 돈을 관리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 데다 이를 불리는 과정 등에서 그룹 차원의 조직적인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수사 초기에는 한화 측도 삼성이나 CJ그룹이 남긴 선례처럼 비자금이 아닌 선친의 차명재산이라는 점을 부각시켰지만 수사가 진행될수록 구석에 몰리는 형국이다. 이번 수사의 단초였던 전직 한화증권 직원의 제보와 진술 자체가 구체적이어서 애초 검찰이 한화그룹의 해명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는 것이 한화 입장에서는 뼈아프다.
이번 사건을 금융감독원에 제보한 한화증권 전 직원은 퇴직 후 개인 사무실을 차려 놓고 선물거래에 손을 댔다가 크게 실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업에 실패한 그는 한화증권에 무리한 요구를 했으나 회사가 이를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금감원에 관련 내용을 제보했고, 한화는 뒤늦게 이 직원을 접촉해 설득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정설이다. 이 소문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실이라면 한화 측 입장에서는 안이하게 대처하다 뒤통수를 크게 맞은 셈이다.
수사를 받고 있는 한화그룹 내부의 분위기는 어떨까. 일단 한화 측은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지난 16대 대선자금도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수사의 본류라 할 수 있는 비자금 조성 혐의에 대해서는 검찰의 논리를 반박할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고 김종희 선대회장의 차명재산이라는 점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대며 상속 재산에 대한 세금을 내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나리오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검찰 수사진의 특성이나 현 정권 출범 후 한화그룹이 취해왔던 스탠스를 고려해 ‘빅딜설’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수사를 지휘하는 남기춘 서울서부지검장이 기업 수사에 무조건적인 무관용 원칙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점에 한화 측은 한 가닥 희망을 걸기도 한다. 남 지검장은 지난 2003년 안대희 대법관(당시 중수부장), 이인규 변호사(당시 원주지청장)와 함께 대선자금 수사를 주도하며 기업들로부터 ‘저승사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당시 안대희 중수부장은 수사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선자금 수사가 성공한 것은 남기춘 검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화 측도 당초 이 사건이 대검 중수부에서 일선 지검으로 내려가자 안도했다가 남 지검장이 있는 서부지검이 맡게 되자 다시 긴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 지검장은 지난 2004년 한 대기업에 대한 수사 때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 법조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당시 모 수산물 업체가 유통기한이 지난 냉동새우를 항공사에 납품했고 이 항공사도 낮은 단가를 이유로 새우를 그대로 계약했다. 당시 수산물 업체가 납품했던 수십만 마리의 새우가 그대로 기내식에 사용됐다. 이를 담당했던 검사가 당시 특수2부장이었던 남기춘 지검장이었다.
그러나 항공사 측에서 대외적인 이미지 등을 고려해 선처를 호소했고, 수사진도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 기준이 애매모호했다는 점과 관련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질 경우 외국인들이 항공사에 대해 갖게 될 부정적 이미지 등을 우려해 적당한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한화 내부에서도 이런 선례 등을 고려해 볼 때 오히려 툭 터놓고 선처를 호소하는 방법이 더 나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런 차원에서 한화그룹 법무실 측의 초기 대응이 미숙했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법조계 일각에서는 한화그룹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 변호인으로 선임한 박영수 법무법인 산호 변호사보다는 남 검사장과 친분이 두터운 이 아무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겠느냐며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이 변호사는 권재진 현 청와대 민정수석의 사법고시 동기이자 남 검사장과는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현 정부의 핵심 정책에 있어서 한화그룹이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점은 한화가 내세울 만한 또 하나의 카드다.
한화는 그간 일자리 창출이나 세종시 수정안 추진 등 이명박 정권의 당면과제에 그 어느 기업보다 가장 협조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일단 전직 직원의 제보로 인해 수사가 시작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김 회장에게까지 불똥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한화가 현 정권의 집권 기간 동안 세운 ‘치적’을 부각시키는 전략이야말로 한화가 내세울 수 있는 최상의 카드가 아니겠냐는 것이 재계 일각에서 내놓고 있는 해법이다.
공교롭게도 한화는 최근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기금으로 5억 원을 내놓고, 김 회장이 중국 다보스 포럼에 직접 참석해 투자 유치에 나서는 등 활발한 외부 활동을 벌이고 있다. 궁지에 몰린 한화그룹이 장고 끝에 내놓을 묘수는 무엇일까.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