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호 회장 강력한 리더십 메우기 숙제…‘일감몰아주기’ 해소 위해 삼형제 간 계열 분리 관측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이 56년 만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으로 예상되면서 장남인 신동원 부회장(사진)이 이끌어갈 그룹의 앞날에 관심이 집중된다. 사진=농심 제공
#창업주의 남다른 존재감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농심은 3월 25일 열리는 정기주주총회에서 신 회장을 사내이사로 재선임하는 안건을 상정하지 않았다. 신 회장의 임기는 3월 16일까지다. 주주총회에는 신 회장의 장남인 신동원 부회장과 박준 부회장, 이영진 부사장을 사내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이 상정됐다.
신동원 부회장이 차기 회장직을 맡을 것으로 전망된다. 신 부회장은 1979년 농심에 입사한 뒤 도쿄사무소·LA사무소 등에서 근무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96년 부사장에 올라 경영 전면에 나섰고, 이듬해 농심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2000년 부회장으로 승진한 후 아버지 곁에서 20년째 그룹 내 입지를 다졌다.
농심의 승계 작업은 사실상 마무리됐다는 평가다.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며 농심홀딩스가 2003년 신설됐다. 이후 신동원 부회장은 주식 맞교환 등의 방법으로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했다. 지난해 9월 기준 신동원 부회장의 농심홀딩스 지분율은 42.92%다.
하지만 농심그룹 내 신춘호 회장의 위상이 남달랐다는 점은 신동원 부회장에게 기회이자 위협 요인이다. 최근까지 신 회장이 본사로 출근해 경영 현안을 직접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그룹 내 전략 방향, 신사업 등 굵직한 사안들을 신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해왔다고 전해진다. 신춘호 회장이 보여준 리더십의 공백을 신동원 부회장이 얼마나 빠르게 메울 수 있느냐에 관심이 쏠린다.
신춘호 회장은 형인 고 신격호 명예회장과 의절까지 결단하면서 ‘농심’을 설립했다. 1960년대 신춘호 회장이 일본롯데 이사로 재직할 때 신격호 회장은 라면 사업을 만류했고, 그 과정에서 형제간 갈등이 일어났다. 결국 신춘호 회장이 1965년 농심의 전신인 롯데공업을 설립했지만, 신 명예회장이 ‘롯데’ 사명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1978년 롯데공업은 ‘농심’으로 사명을 바꾸고 롯데그룹에서 독립하며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1980년대 농심은 라면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 출시된 너구리, 안성탕면, 짜파게티, 신라면은 현재까지도 농심의 매출을 떠받치는 주력 상품이다. 1985년 라면 시장 1위에 오른 농심은 현재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농심의 국내 라면 시장 점유율은 54.2%에 달한다. 신라면, 새우깡 등 상품 이름부터 ‘너구리 한마리 몰고 가세요’,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 등 광고 카피까지 신춘호 회장이 직접 낸 아이디어다.
국내 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 시장에 나선 것도 신춘호 회장의 의지 덕분이다. 창업 6년 만인 1971년 라면을 처음 수출했다. 1981년엔 일본 도쿄에 현지 사무소를 개설했다. 1996년에는 중국 상하이에 첫 해외 공장을 세웠고 중국 공장을 3개까지 늘렸다. 200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유탕면 생산설비를 갖춘 공장도 지었다. 올해 완공을 목표로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건면과 생면 생산시설을 갖춘 제2공장을 짓고 있다. 이런 노력 끝에 농심은 세계 100여 개국에 라면을 수출하고 있다. 지난해 농심 전체 매출의 약 40%(1조 1000억 원)가 해외에서 발생했다.
농심그룹은 공정위 규제를 받지 않기 위해 주식 맞교환 등을 통해 계열 분리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최준필 기자
#공정위 칼날 피하기
농심에게는 ‘계열사 분리’라는 숙제가 남아있다. 특히 오는 4월 공정위가 매년 발표하는 ‘공시대상 기업집단명단’에 농심이 포함될 전망이다. 농심은 대기업 집단으로서 내부거래에 제한이 생기게 된다.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계열사 간 거래 등이 정부, 시민단체, 언론 등의 감시를 통해 규제받게 되기 때문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농심이 장남에게는 식품사업을, 차남에게는 화학사업을 맡기고, 삼남에게는 유통업을 맡기는 식으로 계열 분리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농심그룹은 농심홀딩스를 지배회사로 상장사 3개, 비상장사 15개, 해외법인 15개 총 33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올 3분기 기준 농심그룹 상장사 3개 자산 총액은 4조 7274억 원이다. 농심 2조 8225억 원, 농심홀딩스 1조 2761억 원, 율촌화학 6288억 원이다. 메가마트, 태경농산, 농심엔지니어링, 엔디에스, 농심미분 등 비상장 계열사 15개까지 합치면 대기업 집단 지정 기준인 자산규모 5조 원을 훌쩍 넘어선다.
오래전부터 농심그룹은 높은 내부거래를 지적받았다. 2019년 기준 태경농산은 매출 3485억 원 중 1935억 원을 농심으로부터 올렸다. 전체 매출의 55.5%다. 농심과의 내부거래 매출 비중은 2016년 68.8%, 2017년 61.2%, 2018년 57.0%로 매년 줄고 있지만, 여전히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농심엔지니어링도 2019년 매출 1485억 원 중 59.7%(886억 원)를 농심이 차지했으며 율촌화학의 2019년 매출 4838억 원 중 1643억 원도 농심으로부터 나왔다.
지난해 1월 경제개혁연구소는 “지배주주일가가 계열사 임원직을 수행하고 있는 만큼 농심과 거래에 있어서 적정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며 “공정위 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이 되므로 거래의 적정성 확보가 더욱 중요해진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내놓기도 있다.
농심홀딩스를 대상으로 한 계열사의 배당을 놓고도 뒷말이 나온다. 신동원 부회장,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 신윤경, 신상렬 등 친인척의 농심홀딩스 지분율이 66.6%에 달한다. 문제는 2003년 설립 이후 수익의 대부분을 배당금으로 지급했다는 점이다. 2019년까지 약 800억 원이 넘는 금액이 오너일가에 지급됐다. 2019년 농심홀딩스 매출액은 181억 원이다. 농심(79억 원), 태경농산(62억 원), 율촌화학(39억 원) 등 자회사로부터 받은 배당금이 전부다. 태경농산은 순이익의 84%를 농심홀딩스에 배당금으로 지급한 셈이다. 율촌화학은 21%, 농심은 10%의 배당률을 기록했다.
계열 분리를 놓고는 주식 맞교환 방식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농심홀딩스가 보유한 율촌화학 주식과 차남인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이 보유한 농심홀딩스 주식을 맞교환하면 된다. 농심홀딩스는 율촌화학 지분 31.94%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신동윤 부회장이 보유한 농심홀딩스 지분 13.18%를 처분하는 조건으로 율촌화학 지분 31.94%를 매입하는 것이다.
앞서 2017년 신동원 부회장과 장남 신상렬 씨는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이 보유한 농심홀딩스 주식 30만 1500주를 사들였다. 동시에 신동윤 부회장과 아들 신시열 씨도 농심홀딩스로부터 율촌화학 주식 207만 8300주를 매입했다. 신춘호 회장이 율촌화학 지분 13.5%를 신동윤 부회장에게 증여하면 계열 분리는 마무리된다.
이와 관련, 농심 관계자는 “후계를 위한 승계 작업은 어느 정도 이뤄진 상태”라면서도 “향후 계열사를 분리하겠다는 것에 대해선 전혀 논의한 바가 없다”고 말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