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길 걸으며 작곡가 ‘화려한 외도’
▲ 1988년 촬영된 김연준 박사(앞줄 오른쪽)의 가족사진. |
그 는 연희전문 4학년이던 1937년에 서울의 공회당, 단천, 성진 등지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열었는데 특히 6월 공회당에서의 독창회는 앤더슨(Anderson) 양이 반주를 하기도 했다. 이때 대대적으로 신문에 보도가 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정말이지 멋쟁이 ‘연전 보이(Boy)’였다. 이어 1938년에는 일본의 빅터(Victor) 레코드사의 초청으로 현재명, 김자경과 가곡 12곡을 취입했다. 나중에 들으니 멋쟁이 김연준은 피아니스트 신재덕을 좋아했다고 한다. 팬으로 말이다. 신재덕(이화여대학장)은 필자가 중학교 시절 레슨을 받은 피아노 선생이고, 오재경 전 공보장관의 부인이기도 하다.
‘김연준 가곡 1600곡집’, ‘성가곡집’ 등을 발간한 김연준은 1988년에는 프랑스 루앙(Rouen)대학과 미국의 캔사스 주립대학에서 명예음악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앞서 1960년 모교 연세대학교에서도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 개인적으로 연세대 대선배인 백남이 건강할 때, 백남과 부인 백경순 여사의 저녁 초대를 받고 백남빌딩을 방문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자기가 작곡한 LP판과 가곡집 등을 한 무더기씩 선물했다.
김연준은 연희전문을 졸업하던 해에 천도교회관 앞에 동아공과학교를 설립했고, 해방 후 일본사람들이 떠난 후 왕십리의 소화(昭和)공과학교도 인수 병합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후 한양공업, 한양공과대학, 한양대학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소화공과학교는 일제시대 일본인, 한국인이 같이 다니던 공업학교였다. 당연히 김연준 박사는 초대 공과대학장, 한양대학교 총장에 차례로 취임했다. 또 한양여자대학, 한양고등학교, 한양중학교, 한양초등학교 등을 세워 평생을 ‘한양’을 통한 후진육영에 힘썼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의 힘은 인재에 있고, 인재의 힘은 교육에 있다. 한양대학교는 김연준 초대총장의 근면, 정직, 검소, 봉사의 교학이념과 사랑의 실천정신으로 학교를 키워나가면서 많은 인재를 육성했다.
▲ 1976년 김연준 박사가 국제 피플투피플 제3대 총재로 취임했다. |
또 백남은 자기가 음악의 조예가 깊은 작곡가다 보니 음악대학에도 정열을 쏟았다. 한양대는 한때 사립대학 음대에서 최고를 자랑했고, 특히 가창 부분은 가장 뛰어났다. 백남이 가창을 했기 때문에 그랬을까 싶다. 곧이어 백남은 예술 중에서도 연극영화과에도 힘을 쏟았다.
훌륭한 한양대 동문도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경제인으로는 최원석, 정몽구 등이 한양대 출신이고, ‘국민 탤런트’ 최불암이 연극영화과, 박정은, 고성원 등은 음악과 출신이다. ‘코리안특급’ 박찬호가 체육대학 출신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백남은 세브란스 출신 동문들의 도움을 받아 의과대학을 열고, 1972년에는 부속병원을 설립했다. 한때 미국에서 온 미의회 사람들에게 무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좋은 일도 많이 했다. 그런 식으로 미국에 한국의 우호세력을 많이 만든 것이다.
백남의 한양대 키우기의 마지막 작품은 법과대학이었다.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다 보니 사회정의를 지키는 법관육성을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한양대 법과는 서울대, 연세대·고려대에 이어 가장 많은 사법고시 합격자를 배출할 정도로 성장했다. 정동기 법무차관, 추미애 국회의원 등은 여기에 속한다.
김연준에게도 큰 시련이 닥쳐왔다. 소위 ‘윤필용 사건’에 연루돼 투옥되고, 대한일보도 폐간됐다. 그러나 김연준에게 씌워졌던 혐의들은 후일 법정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백남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승화시켜 ‘청산에 살리라’라는 명곡을 만들었다. 백남이 정치적 회오리에 휘말려 옥고를 치르는 동안은 부인 백경순여사가 이사장으로서 굳건히 한양대학교를 지켰다. ‘자기의 소원은 오직 한양’이라던 김연준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을까. 윤필용 구속 수일 전에 윤필용, 그리고 전두환 대령과 필자가 저녁을 했는데 그 다음날 전두환 대령은 “정보보고에 (윤필용 사건이) 올라왔다고 정보기관의 동기생이 전화했다”고 알려주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88서울올림픽 준비 때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올림픽을 벤치마킹했는데 그중 하나가 어느 정도 건설비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몇 개 대학에 체육관을 지어 경기장으로 활용하는 정책이었다. 서울대가 탁구경기를 치러 유남규, 현정화가 금메달을 땄고, 한양대는 체육관 시설과 좌석을 규격대로 늘려 올림픽 배구경기를 훌륭히 치렀다. 당시 필자가 김연준 총장에게 부탁했는데, 한양대가 기꺼이 맡아주었고 이때 배구 출신인 이강평 교수(현 서울기독교대학 총장)가 애를 많이 썼다. 관람석도 국제배구연맹이 적다고 해 1만 2000석으로 늘렸다.
이때 국제배구연맹회장 아코스타(Accosta)는 네비올로(Nebiolo) 세계육상경기연맹 회장과 나란히 제일 요구조건과 불평이 많았다. 사마란치가 처음에는 귀찮아서 축구 준결승과 함께 배구의 전 경기를 부산으로 내려 보낼 것을 필자에게 지시했다가 백남이 한양대학교 배구경기장을 맡아 주는 바람에 순조롭게 서울에서 배구 전 경기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올림픽 당시 한양대 체육관에 필자도 감독하러 나갔는데, 아코스타 회장이 아이디 카테고리(ID Category)가 해당 안 되는 손님들을 좁은 귀빈석에 앉히려 하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나가 있는 담당관이 저지를 했고, 아코스타는 필자에게 불평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담당관은 규정대로 일을 처리했고 자기 직속상관인 필자의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않은 것이었다. 어쨌든 한양대학교도 서울올림픽 성공에 일조를 한 것이다.
백남은 또 1960년 10월 대한일보를 창립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1973년 윤필용 사건 때 폐간됐다. 1963년에 창립한 기독교신문은 지금도 현 한양대학교 총장이 뒤를 이어 발간하고 있다.
김연준은 1972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처음으로 작곡 발표회를 가진 데 이어 일본 도쿄, 대만 타이베이, 미국의 카네기홀과 애틀란타, 서독의 쾰른,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등지에서 2003년까지 총 26회의 작곡 발표회를 가졌다. 또 가곡집과 음반도 수없이 발표했으니 ‘슈베르트 김’이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린다. 2001년에는 사랑의 실천을 표방하고 2001년 시집 <청산에 살리라>를 발간하기도 했다.
백남은 1976년 미국의 아이젠하워(Eisenhower) 대통령이 민간교류증진을 위해 설립한 ‘People to People Program(PTP-미국 캔자스시 소재)’의 한국본부 총재에 취임했고, 이 친선우호 기구는 전 강원지사 박경원(朴敬遠)과 명지대학교 설립자 유상근(兪尙根) 박사와 함께 추진해 나갔다. 미국의 레이건(Reagan) 대통령, 부시(Bush-Senior) 대통령, 카터(Carter) 대통령 내외와도 교우가 있었다.
백남은 1967년 일본 도쿄 유니버시아드 대회의 명예단장을 맡으면서 유니버시아드와 인연을 맺었다. 대한체육연맹 회장도 지냈다. 1993년에 현 한양대 총장 김종량 박사가 KUSB(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이어서 FISU(국제대학스포츠위원회) 집행위원이 된 것도 우연은 아닌 것이다.
1993년 2월 필자가 대한체육회장 겸 KOC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대학 체육발전에도 눈을 돌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동계종목 육성에 공이 많았던 단국대 장충식 총장이 KUSB 위원장을 너무 오랫동안 맡았다면서 사의를 표명했다. 어쩔 수 없이 KUSB 위원장 후임자를 물색하게 되었는데 88올림픽 배구경기를 맡았던 한양대의 김종량 총장에게 후임을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김종량 총장은 워낙 겸손한 분이라 극구 사양했다. 이강평 KOC 사무총장(한양대 체대학장)에게 상의했더니 김연준 학원장과 상의해보라고 했다. 찾아가서 ‘대학체육 발전을 위해 꼭 김종량 총장이 맡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드렸고 김종량 총장은 결국 수락했다. 김 총장은 93년부터 금년 유병진 명지대 총장에게 바통을 넘길 때까지 17년간 KUSB를 맡았다.
▲ 일본 후쿠오카 U대회를 시찰하는 김종량 KUSB 위원장(필자 왼쪽). |
대학스포츠에서도 한국은 97무주·동계 유니버시아드,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를 유치하며 강국으로 올라섰다. 2003대구유니버시아드 결정은 베이징(Beijing)에서 있었는데 김종량 FISU집행위원의 활동이 컸다. 대구 유니버시아드에는 북한응원단까지 참가하는 등 국내에서 올림픽 수준의 화제를 모았다. 이제 대구는 그 여세로 2011년 세계육상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또 한국은 다시 2015년에 광주에서 하계유니버시아드를 치르게 되어 KUSB의 책임이 무겁게 되었다. 대학생들에게 꿈을 키워주는 일이다.
바야흐로 ‘소셜 네트워크 시대’다. 복잡하고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지식을 습득해 통합하고 판단해서 세계 어디를 가도 처리하고 경쟁에 이길 수 있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 백남 김연준의 교육이념과 기독교정신을 이어받은 김종량 총장의 헌신이 다시금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점인 것이다.
전 IOC 수석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