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도 묵어가는 300년 돌담 마을
▲ 일상적인 자전거를 탄 사람의 모습이지만 3백년 된 돌담이라 생각하니 이채롭다. |
혹시 ‘슬로시티’라는 말을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슬로시티는 느리게 살면서도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지역이다.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 캠페인에는 2010년 5월 현재 19개 나라 125개 도시가 가입돼 있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전남 담양·장흥·완도·신안, 경남 하동, 충남 예산 등 5개 도시가 가입되어 있다.
슬로시티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일단 전통이 잘 보존돼 있어야 한다. 또한 대표할 만한 고유의 먹거리도 있어야 한다. 이웃과 끊임없이 소통을 하고, 마을이라는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에 명확히 충족된 곳이 전남 담양에서도 창평면에 자리한 삼지천마을이다. 이 마을은 지난 2007년 12월 국제적으로 슬로시티 지정 승인을 받았다.
삼지천마을은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형성된 고씨 집성촌이다. 동쪽으로 월봉산, 남쪽으로 국수봉이 솟아 마을을 포근히 감싼다. 마을 안에는 자그마한 냇물이 흐른다. 이 냇물 이름이 삼지천이고 그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해서 삼지천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100년 가까이 된 전통가옥 13채와 300년 전 쌓은 담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그게 오히려 인공적인 것이 아니가 의심하게 될 때가 있는데, 삼지천마을이 그렇다. 마치 민속촌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담장 너머 집 안을 들여다보면 마당에 빨래가 널려 있고, 강아지는 꼬리치고, 텃밭에 심은 마늘이 푸르게 올라오고 있다.
▲ 1915년 지어진 고재선 가옥. |
고정주 고택은 전남민속자료 42호로 지정된 집이다. 솟을대문이 눈에 띄는 이 집은 한말 민족운동의 근원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곳이다. 1913년 지어진 이 집은 안채와 2동의 사랑채, 곡간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ㄷ’자형 남향집이다. 이 집을 지은 고정주는 창평지역 근대교육의 효시인 영학숙과 창흥의숙을 설립한 근대교육운동가였다.
아쉽게도 고재환 가옥은 들여다볼 수 없다. 대문이 굳게 닫혀 있다. 전남민속자료 제37호로 지정된 이 집은 고재선, 고정주 고택에 비해 조금 늦은 시기인 1925년 지어졌다. 남주지방의 전형적인 대농가옥으로 양반집 이상으로 규모가 크고 보존도 잘 되어 있다.
삼지천마을은 고택들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마을 안 담장이다. 토석혼축담이 마을 구석구석 이어져 있다. 그 길이가 무려 3.6㎞에 달한다. 논의 흙을 이어다가 돌을 얹고 흙을 놓아가며 튼튼하게 쌓았다. 비록 슬로시티 지정 이후 마을을 정비하면서 담장을 보수하긴 했지만, 옛날 그대로인 부분이 더 많다. 이 돌담길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100년 전 지어진 집을 개조해 민박을 놓는 ‘한옥에서’. |
삼지천마을에는 전통방식으로 쌀엿을 만드는 집이 여럿 있다. 조선시대 양녕대군과 함께 창평에 온 궁녀들에 의해 전수된 이 지역 고유의 쌀엿은 바삭해서 입안에 붙지 않고, 먹고 나서도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 쌀엿만큼이나 한과와 죽염장류도 유명하다. 특히 죽염장류는 담양의 명물 대나무를 이용하는 것으로 1996년 농림부로부터 전통식품 인증을 받았다. 360년 내력의 고씨 양진제 문중 10대 종가 기순도 씨가 죽염을 이용해 된장, 고추장, 간장, 청국장 등을 만들고 있다.
삼지천마을에 가면 꼭 한옥에서 묵어갈 일이다. 전통 한옥 민박이 다섯 군데 있다. 비록 번듯한 잠자리보다야 조금 불편할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추억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 불을 끄고 누우면 창호지를 하얗게 밝히며 방안으로 들어오는 교교한 달빛, 어느 집 개의 컹컹대는 소리. 한옥에서의 잠자리는 마치 자연의 한복판에서 자는 드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한편, 삼지천마을을 찾을 때는 5일이나 10일을 끼고 가는 것이 좋다. 5일마다 읍내에서 전통 장이 열린다. 삼지천마을 바로 앞이다. 요즘 많이 나는 감과 은행 따위를 싸게 살 수 있다. 흥정을 붙이면 덤으로 끼워주기는 기본. 인정 넘치는 푸근한 장터다.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
여행안내
▲길잡이: 호남고속국도 장성분기점→고창담양간고속국도→담양분기점→88고속국도→고서분기점→호남고속국도 창평IC→60번 국도→SK주유소 삼거리→좌측 방면→창평면사무소→슬로시티 삼지천마을 ▲먹거리: 마을에 유황오리를 잘 하는 갑을원(061-381-6886)이 있다. 간단하면서도 배불리 먹고 싶다면 창평시장국밥이 정답이다. 원조를 자처하는 집들이 즐비하다. 순대와 돼지머리고기를 듬뿍 넣은 것에서부터 선지, 내장, 따로국밥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잠자리: 삼지천마을 내에 한옥민박집들이 여럿 있다. 삼지천민박(010-9086-1039), 삼지내황토한옥민박(010-3628-0157), 매화나무집(010-7130-3002), 한옥에서(011-606-1283), 슬로시티민박(016-602-8115). ▲문의: 삼지천마을(http://www.slowcp.com) 061-380-3807